2015년 7월 15일 수요일

회귀

회귀
심아진

남자의 어머니는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다는 듯 차분하게 비닐봉지를 뒤집는다. 그런 절도 있는 동작과는 대조적으로, 빨갛게 윤나는 사과들은 처량한 소음을 만들며 떨어져 내린다. 쉽게 멍들고 깊숙이 깨지는 소리가 거리를 울린다. 여자는 비탈길을 따라 굴러 내려가는 사과들을 무력하게 바라본다. 열 개만 사려던 것을 스무 개나 산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자신처럼 남자의 어머니도 사과를 좋아할 것이라며 욕심을 냈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다만 사과가 너무 많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뿐인지 모른다. 여자는 그렇게 믿고 싶다.
사과들은 여자의 아쉬운 눈초리에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이 바쁘다는 듯 몇 갈래의 길로 흩어지고 만다.
“어머니…….”
제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환대를 여자에게도 줄 것으로 기대했던 남자는 황망히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본다. 짧은 속눈썹 아래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 여태 무언가를 ‘오해’했던 자가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무력함이 어린다. 그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전화번호를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진지하고 허망하다. 남자의 어머니는 당신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흔한 대사를 읊조린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여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건성으로 들으며 굴러 내려간 사과들의 자취를 뒤쫓는다. 어떤 것은 첫 번째 골목으로 어떤 것은 두 번째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갔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골목이 아닌 큰 길을 따라 우르르 내려가던 사과들이 어디쯤 정착해 있을 지 궁금하지만, 도로가 굽어지면서 사과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남자의 집은 무심하게 높고 과도하게 경사진 곳에 자리해 있다. 스무 개의 사과 중 어느 것 하나도 여자의 발치 아래에 남지 않았다. 남자의 어머니가 좋아한다던 사과들은 남자의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는 여자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여자는 결코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삼 년이 흐른다. 남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삼십 년을 함께 산 어머니와의 정이 더 커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력함을 비웃기 위함인지, 혹은 그저 인생에서 사랑 따위가 시시해져 버려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남자는 여자를 떠난다. 여자는 원망하지 않는다. 조금 거칠어지고, 미약하게나마 강해졌을 뿐이다. 남자는 어머니의 집에서 가능한 먼 곳에 신혼집을 마련한다.
 
다시 삼 년이 흐른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사과를 먹지 않는다. 여자가 사과를 먹지 않아서 여자의 가족들도 사과를 먹지 못한다. 여자는 오로지 꿈에서만 사과를 본다. 갈색의 멍을 숨긴 도도한 사과가 꿈에서 깨어난 여자의 시간을 잠식하기도 한다. 여자는 가끔 사과가 만들어주는 멍을 가슴에 새긴다. 또 가끔은 사과가 줄 수 있을 아삭한 감촉에 군침을 흘리기도 한다. 사과를 먹지 않는 여자는, 다른 사람의 삶과 똑같은 무난한 삶이 자신에게도 전개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진다.
 
십 년이 더 흐른 어느 날, 남자는 대학 병원 부설의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를 보낸다. 그는 영정 앞에서 여자가 떠오르는 자신을, 패륜아라 생각지는 않는다. 남자는 불현듯 여자와 어머니가 대면한 날 이리저리 흩어졌던 사과의 행방을 궁금해 한다. 비탈길의 굴곡을 따라 물처럼 흘러내렸던 사과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남자는 좀 더 빨리 사과를 찾아 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늑골 아래가 쪼개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프다. 오래전에 새겨진 통증. 국화 옆의 향냄새가, 묘연했던 추억의 퇴로를 열어준다. 남자는 무방비로 옛 기억에 잠식당한다. 그는 희끗거리기 시작한 머리에 삼베 모자를 눌러 써보지만 전처럼 감정을 숨기는 일에 능숙하지 않다.
남자는 십 육년 전 사과를 샀던 곳을 찾아,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어머니의 동네를 방문한다. 그러나 주황색 천막 아래 과일들이 풍성했던 예전의 그 가게는 없다. 대신 총각들이 모여 싱싱한 채소를 판다는 식료품점과 유기농 제품 매장, 작은 규모의 슈퍼 등에서 과일을 팔고 있을 뿐이다. 남자는 이 가게, 저 가게를 모두 거쳐 조금씩 사과를 산다. 스무 개쯤 될 것이다.
멀리서 보는 남자의 어머니 집은 예전처럼 위풍당당하지 못하다. 조만간 불합리한 값에 처분될 것을 예상하고 있다는 듯 낙담한 모습이다. 그래도 길은 여전히 가파르고 도도하다. 남자는 십 육년 전의 사과가 행여 눈에 띄지 않을까 하여 주변을 세밀히 관찰한다. 한 알의 사과는 한동안 남자의 집 매끈한 유리창을 두드렸을지 모른다. 한 알의 사과는 혹, 직장에서 유난히 승진이 빨랐던 그의 사무실 책꽂이 속에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 남자가 결혼한 여자와 살을 섞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을 때 그 옆을 굴러갔을 수도 있다. 사과는 또, 남자가 유유한 별 하나를 발견했을 때 남자의 구두 옆에서 지친 걸음을 멈추었을 수도 있다. 사과는 빈번히 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하며 하릴없이 남자의 주변을 맴돌았을지 모르겠다. 남자는 창백한 골목 사이에서 길을 잃었을 사과를 떠올리며 힘겹게 길을 오른다.
남자는 여자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서 있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사과를 떨어뜨린다. 탱글탱글하던 과일들이 순식간에 생채기를 내며 길을 따라 굴러간다. 잠시 하나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던 사과들은 이내 천 개의 길로 흩어진다. 그것들은 비루한 일상으로부터 도망이라도 가듯 하나같이 급하다. 황망히, 수줍어하며, 길 아래로 내달리는 사과들이 있다. 작은 골목길을 따라 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사과들도 있다. 골목은 심심치 않게 많고 길은 심오하게 굽어 있다. 남자의 선량함과 무거움, 소심함과 가벼움이 길을 따라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남자는 잠시 화를 낸다. 하지만 자신의 주위에 남아 있지 않은 사과를 오래 원망할 수는 없다. 남자는 낮고 침울하게 여자의 이름을 불러본다.
여자는 인기 없는 영화를 혼자 보고 있다. 위염을 자주 앓는 배를 위해 하루 한 잔으로 제한한 커피를 소중히 마신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여자는 베란다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나뭇잎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다급하게 뛰어나가다가, 꼬리가 잘린 고양이가 화단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 여자는 손톱을 손질하고 화장을 곱게 한 날 서럽게 운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매일, 길을 따라 사라진 사과들을 생각한다. 굴러 내려가는 그 속도를 상상하고, 알 수 없는 길의 모호함을 떠 올리고, 막다른 곳의 냉담함에 부대낀다. 여자는 사과들이 흩어져 있는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해 평생, 애를 쓴다. 그것이 여자가 사과를 먹지 않는 이유다.
여자의 친구들은 사과를 먹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자식들은 그런 여자를 부끄럽게 여겼다. 남편은 여자가 사과를 먹지 않으므로, 자주 화를 냈다. 여자는 그 모든 것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그녀의 회한 만큼 무거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위악을 떨든, 합리화로 몸을 숨기든, 체념으로 밥을 먹지 못하든, 여자에게 사과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무엇이었다.
 
남자가 사과를 모으기 위해 사과를 다시 흩어버린 그 날로부터 십 년이 더 지난다. 여자는 알지 못하는 시간이나, 남자에게는 지나치게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사실 여자가 알지 못한다는 가정은 여자의 무의식 너머에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자는 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던 사과가 결국 어디서 다시 모이는지 예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그래서는 안 되는 것들로 둘러싸인 일상이 대수롭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여자는 남자와 그의 어머니가 살던 집에 가보기로 한다. 길 아래에서부터 보였던 남자의 집은 주변 건물이 높아진 탓인지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큰 길 대신 작은 골목길을 통해 남자의 집까지 올라가기로 한다. 사과를 비롯해 과일들을 파는 가게가 나란히 두 집 있다. 사과처럼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모자를 쓴 마네킹이 서있는 의상실을 지난다. 여자는 모퉁이를 돌아 큰 길이 나오자 다시 반대편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담장 위에 줄줄이 능금 화분들을 올려놓은 몇 채의 집들을 지난다. 단단한 작은 알맹이들이 규모 있게 반짝인다. 다시 큰 길과 연결되어 있는 골목 어귀에 이르자, 사과를 테마로 한 놀이터가 보인다. 여자가 걷는 길 가득 사과향이 아삭하게 퍼져 있다. 여자는 이십 육 년 전, 스물여섯 살 젊은이로 걸어갔을 때보다 더 가슴이 뛴다. 이제 겨우 작은 골목 두 개를 거쳐 왔을 뿐인데 벌써 그녀는, 걸어갈 모든 길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소연하지 않아도, 울거나 절규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런 나이가 있다. 여자는 이 거리 곳곳에 천 개의 길로 갈라져 내려갔던 사과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있음을 알아차린다. 여자는 사과 꽃처럼 하얗게 웃는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의 어머니가 서 있었던 그 자리에 단아한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파란 빛을 연하게 숨긴 빨간 사과들이 당돌하게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는 그 부끄러움 없는 시선 때문에 늙고 거친 피부를 발그레 물들인다. 길을 오래 돌아왔어도 남자와 여자는 너무 늦지 않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여자는 작은 사과 하나를 따 베어 문다. 영겁을 회귀하여 마침내 여자에게 온 사과는 그리운 맛이 났다.
<끝>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