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5일 수요일

신의 길

신의 길
심아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천지를 창조하기 전, 신은 흑암, 혼돈, 공허라는 세 벗과 함께 있었다. 신과 벗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란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요한 산책을 하곤 했다. 벗들은 신의 창조에 대해 근심이 많았다.
 
한 점의 얼룩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검은 흑암이 신의 계획을 통곡으로 만류했다.
“도대체 왜 자청해서 일을 벌이시려는 거죠? 저는 이대로도 충분히 좋은데…….”
흑암은 신이 무엇을 구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과 정확히 반대되면서 동류인 짝, 빛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흑암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했다.
“빛은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말 거여요. 숨겨져 있던 고결한 비밀을 티끌 하나까지도 찾아내려 하겠죠.”
신은 말없이 흑암을 어루만져 주었다. 흑암은 신이 구상하는 처음은 알 수 있었지만 그 끝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역시 자신처럼 괴로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혼돈이 축 쳐져 있는 흑암을 등 떠밀며 신께로 나아왔다. 그의 주변에서 소란한 파장이 일었고 순식간에 동요와 불안이 솟아났다.
“전 당신이 하려는 일에 찬성해요. 우리 모두는 당신이 만든 만물에 깃들어 그 세상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볼 수 있겠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혼돈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는 불의와 정의, 선의와 악의, 기쁨과 슬픔, 진실과 거짓 등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형태의 귀퉁이 한 부분, 의미의 작은 토씨 하나만 틀어도 그것들은 쉽게 변질되어 버릴 터였다.
하지만 시니컬했던 혼돈은 자신이 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의기양양하던 태도를 버리고 갑자기 의기소침해져서는 걱정스레 신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계획을 접어버리세요. 우리들로 이미 완벽하지 않나요?”
신은 이번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혼돈은 그의 눈에 어린 단호함을 읽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은 종류가 다른 완벽함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의 고집은 곧 그의 본질이므로 아무도 꺾을 수가 없다. 혼돈은 가학과 피학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신은 이제 공허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그가 차분하고 끈질기다는 것을 알기에 신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마침내 끝도 시작도 없는 길에서부터 걸어왔다는 듯 피곤해 보이는 공허가 신을 불렀다.
“왜 저희들을 모두 없애버리시고 그것들을 만드시지 않는 겁니까?”
신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공허는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고 다시 물었다.
“흑암과 혼돈이라도 떼어내 버리세요. 저만 있어도 충분히 새로운 세상을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공허는 ‘아니면 흑암과 혼돈을 두고 저만 없애시든지요.’라고 말하려다, 신이 이미 자신의 대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입을 닫았다. 처연하고 건조한 부동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신이 자신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세 벗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에는 세 벗과 완벽히 다르면서도 다른 차원에서 동일한, 놀라운 세상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신감이 흘렀다.
 
그리고 아둔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면에서 적절한 세월이기도 했다. 신은 이제 자신이 만든 세계와 세계를 넘어서는 다른 곳을 두루 오가고 있었다. 예상대로 흑암과 혼돈과 공허는 뜨거운 커피에 녹아드는 설탕처럼 세상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명암이 조금 변했을 뿐인 흑암과 형태에 약간의 변화만 가해진 혼돈, 그리고 순수하게 압축되었을 뿐인 공허가 가끔씩 신의 길에 나타나곤 했다.
“조금 하얘진 것 같기도 해요.”
흑암이 말했다.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혼돈이 말했다.
“창조 전이나 후나 다를 게 뭐여요?”
공허가 말했다.
신은 자신의 본질인 고집을 꺾지 않으며 다만 그윽한 미소로 그들을 응대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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