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5일 수요일

진심

진심
심아진
 
이렇게 살면 안 돼. 우린 좀 더 투쟁적일 필요가 있어. 제도권에 속하지 못한 인간은 물렁해지고 납작해져서 겨우 체제가 필요로 하는 손수건 한 장이 될 뿐이니 말이야. 그 손수건으로 땀도 닦고 코도 푼다고? 그래, 가끔 빙빙 돌려 목에 감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별 수 있어? 그냥 손수건일 뿐이지. 급할 때는 용변을 처리하는 휴지로 전락될 수도 있는 게 손수건 한 장이야.
라이프니츠는 상대적인 우리 세계를 ‘신의 지성 안에 묻혀 있는 거대한 신비’에 의해 실존하는 유일한 세계로 보면서 두 세계가 결코 공존가능하지 않다고 보지. 라이프니츠를 해석한 들뢰즈에 의하면 죄인인 아담과 죄인이 아닌 아담은 모순 관계인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인 아담이 사는 세계와 죄인 아닌 아담이 사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상정해야 해. 나는 여기에 동의해. 두 세계는 공존불가능해.
세상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그림 따위를 보는 것은 사치야. 회화에서는 모든 개성들이 동시에 함께 일어나 우리 앞에 펼쳐지지만 시문학에서는 그렇지 않아. 시문학은 동일한 총체성이 되지 못하고, 표상은 그 속에 내포된 다양한 것을 순차적으로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지. 사실 이것은 결점이기도 하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결점이야. 말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특성들이 순차적으로 나오더라도 그것들을 통일시키고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해서 표상의 이미지 속에 정착시킬 수 있기 때문이지. 時文學은 文學이고, 또 學이야.
정말 우울해. 살고 싶지 않아. 왜 정언명제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어. ‘담배는 몸에 좋다’는 건 전칭긍정이야. ‘어느 담배도 몸에 좋지는 않다’가 전칭부정, ‘어느 담배는 몸에 좋다’가 특칭긍정, 그리고 ‘어느 담배는 몸에 좋지 않다’는 특칭부정이 돼. 이게 어려워? 이 정언명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가언명제나 선언명제는 어떻게 이해하겠어? 아무리 어려워도 이렇게 무지막지한 세상에 맨 몸으로 나가는 것 보다 어렵진 않을 거 아냐. 이해를 못하겠어. 난 지쳤어.
 
…….
 
나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투쟁적이어야 한다며 손수건에 관해 한 말은 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기득권에 속해야 한다.”는 엄마의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츠의 공존불가능성은 한 마디로 “그런 애랑 놀기만 해 봐.”이고, 칸트에서 훔쳐 왔을 시문학에 관한 명상은 그저 “스마트폰을 없애버려야 공부를 하지.”라는 푸념에 다름 아니었다. 마지막 단락은 당신도 알 것이다.
세상에, 담배를 피우다니!(담뱃값도 올랐는데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엄마, 제발 제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 ‘엄마’라는 이름을 주어 감사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사실 전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기도 무서워요. 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학교 가는 제 뒷모습만 보아도 가슴 뻐근해진다고도 하지 마세요. 어디에 있든 담배를 피우지 않고서는 진정이 되질 않는단 말이에요.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제 편이라고 하지 마시고, 저를 믿고 응원한다고도 하지 마세요. 결국 다른 애들 다 밟고 넘어서라는 얘기잖아요. 실수해도 넘어져도 좌절만 하지 않으면, 멈추지만 않으면 다 괜찮다구요? 맙소사, 어디까지 저를 몰아붙이실 건가요? ‘나 하나쯤 늙고 볼품없어지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이 최악이어요. 제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세우고 있으니 그렇게 늙고 흉해지는 거여요.
이 모든 것을 용납하지 못 하겠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받아들여주세요. 엄마가 아무리 정의롭고 소신 있으며, 논리적이고 지적인 척 얘기해도 저는 엄마의 진심을 알아요. 엄마는 결코 엄마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이렇게 적힌 편지를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
엄마, 죄송해요.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