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5일 수요일

그저 우연일 뿐이겠는가?

그저 우연일 뿐이겠는가?
심아진
 
지독한 냄새였고 견디기 힘든 추위였다. 또한 온몸이 진딧물의 수액처럼 묽게 녹아내릴 듯한 더위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거무튀튀하고 끈적거리는 늪 속에서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의지로 20개월을 버텼다. 아무도 우리들이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우리들이 이런 곳에 버려진 것인지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 누군가를 알지도 못하였거니와 우리에겐 심지어 말을 할 수 있는 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은 이룰 수 없으니 가지는 게 분명하다고 믿고 체념할 무렵, 희망이 보였다. 탄력이 강한 무언가가 우리 모두를 삼켰고,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놈의 장 속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양분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도록 몸에 붙은 섬모를 제거하고 새로운 피부를 만들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우리 모두를 이끌고 있었다.
 
겨울잠에서 깬 후 오랜만에 포식을 한 달팽이는 과식의 후유증을 톡톡히 겪었다. 똥에 양분 외의 무언가가 더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내내 속이 더부룩하였고,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이전보다 더 천천히 먹고 더 느리게 움직였지만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있던 곳보다는 확실히 나은 곳이었다. 어두웠기 때문에 더 이상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으며, 기분 좋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습하고 따뜻했다. 작은 행운에 너그러워진 우리는 스스로를 혹은 형제를 해치며 퇴행하는 대신 수차례에 걸쳐 더 나은 모습으로 거듭났다. 미라키듐, 스포로시스트, 레디아, 세르카리아…. 복잡한 이름들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들이 모두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서 쏟아진 무수한 우리 자신들을 보며 혼돈에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즉 나이기도 한 우리, 그리고 우리이기도 한 나는 또 누구인가? 이관규천以管窺天. 좁은 소견으로 주변을 둘러보아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수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주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표면적으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긴 꼬리였다. 그 누구도 꼬리의 쓰임새를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일단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감사한 보람이 있게도 그 꼬리는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부작침磨斧作針. 우리는 빈약한 꼬리를 휘둘러 뚫릴 것 같지 않은 놈의 장에 딸린 샘을 지나 마침내 허파로까지 이동하였다. 형제 몇이 죽어 나가는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으나, 결국 해냈다. 희망이 더 이상 희망으로만 남지 않았던 상황, 곧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던 상황을 이미 한 번 경험한 우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증세를 넉 달이나 겪은 후 달팽이는 마침내 심한 호흡 곤란을 느끼며 가래를 뱉어냈다. 자신을 괴롭히던 무언가가 간신히 떨어져나간 것 같았다. 기운이 빠진 달팽이는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 한 채, 죽은 듯 늘어져 있었다. 뱉어낸 가래에서 수많은 작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눈이 나쁜 달팽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달팽이는 그저 속이 편해져서 다행이라 여기며, 알고 싶지도 않은 세상을 내버려둔 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외부 공기는 시원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다시 이전보다 더 좁고 갑갑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십밖에 안 되는 적은 무리로 나뉜 우리는 잠시 불안감을 느꼈지만, 어쨌거나 가야할 곳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를 이끄는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적절한 체념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개미는 자신도 모르게 끈적거리는 것을 후루룩 들이마셨다. 하얀 거품에서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감칠맛이 났다.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잊은 채, 개미는 생소한 행복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몸 전체가 양분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엄청난 단백질 공급원인 달팽이의 냄새가 입안에 가득했다. 달팽이를 통째로 먹고 둥지에도 가져갔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멀리 있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 만 했다.
 
이제 오십이나 되는 나머지 형제들의 생존은 모두 내게 달렸다. 형제들은 더 이상 나를 불신하지 않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나 스스로 나를 신뢰하여 생긴 결과였다. 형제들은 무사히 새로운 곳으로 옮겨온 것을 모두 내 덕으로 돌렸다. 전 지휘권을 내게 넘기고는 그간 피폐해진 건강 상태를 돌보기 위해 자신들에게 적절한 공간들을 찾아 나섰다. 최소 2개월. 그 안에 우리가 자리 잡은 이 새로운 몸뚱이를 어떻게든 길들여야 했다.
하지만 녀석을 길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간 겪었던 냄새도 비좁음도 지금 발휘해야 할 인내에 견줄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는 녀석과 내가 거의 하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충분히 먹지 못한 형제들이 힘을 잃어갈수록 나는 더욱 초조해졌다. 지쳐갔기 때문에 의구심도 깊어갔다. 우리는 왜 또 다시 다른 어떤 곳으로 가야 하는가? 더 나은, 더 풍부한 곳으로 가면 이 굶주림이 끝나고 이 미칠 듯한 갈증이 끝이 날까? 그리고 마침내 그 어떤 애면글면한 조바심 없이 완벽하게 평화를 누리게 될까?
 
보름달이 동그랗게 뜬 밤, 겁도 없이 한 마리의 개미가 대열을 이탈했다. 그는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싱싱하고 보드라운 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달과 가까이 갈수록 위험에 노출 될 확률이 커지지만 개미는 이미 무아지경에 이른 듯하다. 마침내 그의 단단한 집게턱이 풀을 꽉 물었다. 그대로 동상이 되어 버린 듯, 개미는 동이 트기까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오늘도 간신히 녀석을 조종해 제 무리로 돌려보냈다.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 발각되면 녀석은 사지가 찢기는 참형을 당해야 할지도 몰랐다. 또한 한낮의 태양 아래서는 녀석만 타 죽는 게 아니라 우리까지 녹아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서둘렀는데도 녀석은 답답하게 움직였다. 그를 덜 미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또 완전히 미치게 만들어서도 안 되었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 그의 일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일은 중요했다.
 
밤이 되자 개미는 다시 한 번 대열을 이탈해 풀잎 위로 기어올랐다. 근처에 있던 개미가 잠시 이상하게 여기는 듯 했으나, 다행히 그를 주시하지는 않았다. 별과 달과 바람이 속삭이는 시간들이 더디게 흘렀다. 개미는 어찌하여 자신이 온 몸이 경직된 상태로 풀끝에 매달려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그다지 기억에 남지도 않는 것처럼 지금의 상황도 일어나는 내내 모호하기만 했다. 풀에 매달려 있는 것이 과연 자신이 맞는 것인지, 자신의 단단한 입이 정말 풀을 물고 있기는 한 것인지, 모든 것이 아련했다.
 
호미난방虎尾難放. 잡았던 범의 꼬리를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성공을 위해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침 해가 뜨고도 한참을 더 녀석을 장악하고 있었다. 녀석과 마찬가지로 아둔한 녀석의 진영에서는 대원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여느 때처럼 대열을 갖추고 행군을 준비했다. 해는 점점 뜨거워졌다. 기대했던 게 큰 만큼 원망도 큰 형제들이 내게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배신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녀석의 머리에 자리를 잡은 내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 형제가 기어오기 시작했다. 형제는 녀석을 조종해 잠깐의 뜨거움이나마 면하는 게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교각살우矯角殺牛.내 계획이 전부를 몰살시키고 말 거라며, 그는 나를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위엄을 잃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그것은 사실 나 스스로 확신이 서서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달리 누구를 믿겠는가? 사실 나는 벼랑 끝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면 나는 내 지휘권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배고픈 형제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터였다. 하지만 이미 내게 도전장을 던진 그에게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녀석과 내가 서로를 맞잡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사이후이死而後已의 태세로 결전을 앞둔 찰나, 우리 모두는 어둡고 거대한 통로로 빨려 들고 말았다.
 
신중하지 못한 젊은 양은 이른 아침부터 풀을 뜯어 먹는 우를 범했다. 그 풀에 꽉 달라붙어 있는 작은 개미를 보지도 못 한 채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제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또 성급히 움직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맛있는 풀의 향을 음미하고 있다. 잠에서 깨지 않은 다른 양들이 오기 전에 보드랍고 맛있는 풀을 먼저 먹으려는 양의 입은 바빴다. 조기조포충 早起鳥捕蟲! 그러나 일찍 일어나는 새는 더 일찍 일어나는 사냥꾼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양은 아직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미끌거리고 아늑한 그곳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했다. 우리는 험난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축배를 들었다. 배불리 음식을 먹고, 취하고 춤을 추었다. 마침내 우리는 나뭇잎 모양으로 변한 몸을 음란하게 흔들어대며 우리 자신들과의 교미를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자웅동체였다.
번식에서 오는 충만한 행복감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납작하게 눌려 죽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모종의 우울함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충만감과 결핍감을 동시에 느끼며 알을 낳는 순간에, 우리는 여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으나 완전히 우리와 똑같이 생긴 어떤 이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는, 설령 미소를 지을 입이나 입가의 근육이 없다 하더라도 분명 웃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물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일 뿐이겠는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우리를 낳았고, 여태 그곳을 떠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우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랬다. 학명 파스키올라 헤파티카Fasciola hepatica. 우리의 이름은 간충肝蟲이었다. 나갈 준비를 마친 이만 여 개의 알들이 우리들의 몸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겪었던 모든 것을 겪고 다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또 하나의 자신인 우리를 만날 수도 있을 그 알들.
지금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 알들이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우리는 그 어떤 시간도 장소도 사건도 기억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쏟을 뿐이었다. 생이여! 알들은 내게 충성스럽게 손을 흔들며 빠르게 떨어져나갔다. 우리는 눈물을 흘릴 눈도 없고 눈물샘도 없었지만 어쨌든 울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무의미한 우연일 뿐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끝> 원고지 2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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