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5일 수요일

감자와 나

감자와 나
심아진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 말기 바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총각인지, 노처녀인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감자볶음 요리를 하기로 했다. ‘감자볶음’을 검색하고 찾은 인터넷 블로그에서 남편이 어쩌고 아이가 어쩌고 하는 설명이 한참 이어지다가 준비물이 나왔다.
감자 2개, 양파 반 개, 당근 반 개, 양배추 약간, 후추 약간, 양념간장 2, 참기름 1, 통깨 1
어이가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재료들이 아닌가 말이다. 감자볶음에 양파는 왜 들어가며 당근에 양배추까지? 게다가 크기도 다른 채소를 놓고 반 개는 뭐며 약간은 또 뭐란 말인가. 아,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 어디까지나 나 역시 내 식대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다. 그냥 내 기준에서 황당했다는 얘기다.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 있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트라우마 같은 게 있게 마련이다. 가령 당신은 내가 “부등식 (x+y-4)(2x-y+3)≥0을 만족시키는 실수 x, y에 대하여 x²+y²의 최솟값은?”에 대해 이건 기본도 안 되는 문제라고 말했을 때, 황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금방 풀었다고 하더라도 제발 너무 쉽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숫자 놀음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요리를 해 보고자 한 것뿐이다. 거창하지 않은 소박한 감자 요리 말이다.
검색창에 다시 한 번 감자볶음을 입력했다. 화면에 떠 있는 사진 중 감자의 허여멀건 한 색이 두드러진 것으로 골랐다. 그러니까 양배추나 당근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내가 먹겠다는 것은 어쨌든 감자니까 말이다. 나는 곧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알았다. 내가 먹으려는 음식은 ‘감자볶음’이 아니라 정확히 ‘감자채볶음’이었다. 양배추나 당근이 재료에 없는 그 블로그에서는 그렇게 명명하고 있었다. 그렇다. 처음의 실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몰라서였음에 틀림없다. 감자와 감자채의 유의미한 차이. 나는 미묘한 차이 때문에 일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 일이 있다. 제발 감자볶음이나 감자채볶음이나 같은 거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어떤 현상은 뭉개버리고 모르는 체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나는 살짝 이 부분을 넘어가고자 하니, 제발, 눈감아주기 바란다. 아무튼 나는 성급하게 마우스의 스크롤바를 내렸다. 이 요리법을 올려놓은 사람 역시 여름이니 매미니 하는 얘기를 한참 떠들다가 겨우 준비물을 내놓았다.
감자2, 양파1/2, 대파1/2, 굵은 소금, 포도씨유, 소금, 후추, 참기름, 통깨
역시 만만치 않은 재료다. 나는 단 두 번의 검색으로 ‘간단한’ 감자채볶음 같은 것은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다. 오래 고집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것은 결국 감자도 뭣도 없는 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채소의 크기 따위에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고, 여타 다른 식재료에 관해서도 순종하기로 했다. 내게 얼마간의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여러 크기의 감자가 담겨 있는 바구니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겠지만, 결국 현명하게 제일 큰 감자와 제일 작은 감자의 딱 중간 정도 되는 크기의 감자를 고를 것이다. 일본인들에게는 잘 없다는 이 유도리ゅとり. 나는 순순히 양파니 대파니 하는 것들도 결국 감자채볶음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아이에게 실험해 보라. 네 대를 맞을래, 두 대를 맞을래 하고 물어보면, 사는 게 생각보다 거칠다는 것을 인정하는 평범한 아이라면 반드시 두 대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당근과 양배추가 빠졌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안을 받았다. 두 대쯤은 기꺼이 맞아줄 수 있다.
게다가 양파나 대파나 둘 다 파가 아닌가. 나는 작은 위안에도 만족하며 장을 보았다. 실제로 나는 양파 한 망 값으로 삼천 육백 원을, 대파 한 묶음 값으로 이천 팔백 원을 지불했지만, 그냥 묶어서 파 값으로 육천 사백 원을 지불했다고 생각했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심플한 것들이 사람을 얼마나 위로하는가 말이다. 파 육천 사백 원!
그러나 그 다음 장벽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천일염, 구은 소금, 맛소금, 심지어 허브맛 솔트까지 집에 있었지만,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굵은 소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슈퍼마켓의 소금 진열대 앞에서 허리를 폈다 굽혔다를 반복했다. 소금의 화학 기호 NaCl. 이온 결합시 음이온의 크기와 양이온의 크기로 결정의 모양이 정해지는데, Na+이온을 향해 Cl-이온이 소위 xyz 세 방향에서 붙어 있어야 안정된 형태를 띠게 된다. 결정이 굵어지려면 결정들이 모이는 시간이 어느 정도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저온에서 오래 끓여진 것, 즉 염전에서 구한 NaCl이 바로 ‘굵은 소금’이 되는 것이다. 찾았다. 일 킬로그램짜리 배추절임용 소금.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킬로그램이나 오 킬로그램을 사야했다면 정말 갈등했을 것이다. 이러면서까지 감자채볶음 따위를 먹어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이제 슬슬 지겨워진다고 말하지 말라. 뭐니뭐니해도 가장 괴로운 것은 나다.
내게는 아직도 포도씨유와 후추, 참기름, 통깨라는 거대한 관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건너뛰기로 하자. 당신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내가 정말 말하기도 싫을 정도로 지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쇼핑백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쓰레기봉투에 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점원과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진이 빠져 돌아왔다는 것만 말해두고자 한다. 사실 나는 오랜 사유와 번뇌의 시간 끝에 고른 음식 재료들을 쓰레기 취급하기 싫어서 계속 아니오, 라는 말을 반복한 죄밖에 없다. 그 쓰레기봉투가 그 쓰레기봉투인지를 몰랐을 뿐이다. 내가 점원을 무시했다거나 놀리려고 그런 게 정말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요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빗살무늬토기부터 굽기 시작해 단번에 인류의 요리 역사 전체를 경험한 사람처럼 피로해졌다. 뼈가 흐물거리고, 손이 떨려 이러다 정말 암이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필 암이 떠오른 것은 감자가 항암 효과에 탁월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항암 효과를 가졌다는 성분인 알파카코닌과 알파솔라닌은 감자의 껍질과 싹에 많이 들어 있는데, 조리시 거의 제거되어버린다. 그럼 감자를 껍질 째 삶아 먹든지, 생으로 갈아 먹으면 고생도 하지 않고 좋지 않았겠냐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비이성이나 억지라고만은 할 수 없는 성향 혹은 취향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모서리가 둥근 지갑이나 노트를 사야만 만족하고, 누군가는 꼭 문을 등지고 앉아야만 마음이 편하다. 앞머리를 내리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 있고, 단추나 지퍼를 모두 잠그면 답답해서 미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무조건 감자채볶음이 먹고 싶다. 그러니 관심과의 구분이 몹시 애매한 간섭이라면 거두어 주시라.
아무튼 나는 감자를 내 식대로 먹기 위해 꺾이려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조리대에 섰다. 먼저 다루기 쉬운 과도로 감자를 돌려 깎았다. 푸르스름한 독은 보이지 않았는데, 보였더라면 얼마만큼 도려내야 인체에 득이 될지 해가 될지를 가늠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푸른 싹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조심해야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때문에 약간 서운해졌다. 그렇다니까. 인간은 아주 약간이라면, 스트레스를 반기기도 한단 말이다. 무병장수하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 은근히 비운의 주인공처럼 요절하기를 바라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맞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로 누가 좀 때려줬으면 하고 기대를 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란 말이다. 당신은 아니라고? 그래, 그래. 성향이니 취향 얘기를 한 것은 나니까, 이쯤에서 넘어가는 게 좋겠다. 요리를 계속 하자.
나는 인터넷에서 시키는 대로 감자를 채 썰었다. 굵게? 가늘게? 그냥 내 성향과 취향대로 썰었다. 그리고 잘 썰다가 내 손톱도 하나 둘 같이 썰었고, 급기야 살도 조금 썰었다. 물론 엄청나게 아팠다. 하얀 감자가 빨갛게 변할 만큼은 아니었고 그저 연한 살구색이 될 정도로 피가 났지만, 아무튼 꽤 따끔거렸다. 검지의 손톱 아랫부분. 한참 지혈을 한 후, 나는 도대체 감자를 어떻게 쥐고 칼을 어떻게 썼길래 베인 것인지를 알기 위해 동작을 재현해보았다. 마치 범죄자가 범죄 현장에 다시 가는 것처럼, 나는 조금 전의 내 행동을 흉내 내보았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숭고한 본능 중 하나다. 물론 일부러 확대해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단지 궁금했던 것이다. 어째서 납득할 수 없는 부위가 칼에 밸 수 있었던 것인지를. 그것은 도저히 그럴 수 없으리라 여겼던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처가 난 부위는 결코 상처가 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맙소사! 이런 때 드는 게 자괴감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처럼 잘 잊는 유전자의 힘을 빌어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였다. 우선 밴드를 손가락에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 썰다 만 감자를 왼손에, 칼은 다시 오른손에. 나는 마음을 다스리며 칼질을 겨우 마치고, 안내문에서 시키는 대로 감자를 물에 담갔다. 녹물을 빼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다음으로 양파와 대파 썰기. 예상했겠지만 쉽지 않았다. 맙소사. 내가 흘린 눈물의 양을 봤다면 틀림없이 내가 양파와 파의 죽음을 애도해서 그렇게 울었다고 할 것이다. 나는 눈이 벌게진 채, 주방에서 가능한 먼 곳으로 이동해 티슈로 눈물을 닦아냈다. 사는 게 왜 이런지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눈물을 쏟고 나니 사는 게 왜 이런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울다 지친 인형처럼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물에 잠겨 있는 감자가 나를 불렀다. 야!
팬에 포도씨유를 두른 후, 물을 빼고 체에 건진 감자를 쏟아 부었다. 지지직. 소리만 요란한 게 아니었다. 기름과 물이 서로를 경멸하며 튀어 오르는 힘이 엄청났다. 뜨거운 기름에 물이 닿으면 난리가 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도 본 바가 있는 사람인데, 왜 몰랐겠는가? 그러나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지나치게 감자에 집중했기 때문에, 체에 걸렀다 하더라도 남아 있을 물을 간과했던 것이다. 눈두덩과 광대뼈 부근이 따끔거렸다. 피부가 살짝 벗겨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손으로 따끔거리는 부위를 비볐다. 곧 실수를 깨달았지만 양파와 대파의 유황 성분이 더 빠르게 손에서 눈으로 옮겨간 뒤였다. 눈이 아리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앞이 흐릿한 가운데 간신히 벽을 더듬어 욕실로 갔다.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고 눈을 헹구고, 다시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세상이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내게 왜 교훈 같은 것을 주려는지 왜 시험 따위가 필요 없는 나를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지 세상에게 따져 물으면서, 나는 비틀비틀 욕실을 나왔다. 하지만 내가 겪어야 할 악운이 아직도 한 줄 더 하늘에 쓰여 있었던 모양이다. 중불로 줄여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을 감자가 센불에서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림에 지쳐 흘렸을 감자의 눈물이 매캐한 연기로 기화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그래,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감자채볶음을 먹지 못한 인간의 기력이라는 게 결국 이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원고지 30매. 마지막으로 질문하시라. 그 후로 감자채볶음을 다시는 하지 않았느냐고? 당연히 하지 않았다, 라고 답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러지 못했다. 똑똑한 인간이라면 깨끗이 포기했겠지만, 똑똑하지 않은 나는 미련함과 도전정신을 쉽게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블로그 찾는 것은 두 번 만에 쉽게 포기하더니, 감자채볶음은 왜 그러지 못했냐고? 똑똑하지 못해서 그랬다니까 그러네. 그냥 상황 따라 쉽게 변하고 한없이 모순된 게 인간이라고 해 두자. 뭐? 일반화시키지 말라고? 그래, 그래. 알았다. 개인의 특성이 군집의 특성을 능가한다는데 언제나 동의하는 나다.
사실 이론상으로 남은 변수랬자 소금의 문제나 마늘의 문제 등 몇 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재료에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수와 모든 재료의 수를 곱하면, 아니 숫자 놀음은 하지 않기로 했지. 어쨌든 ‘그까짓 감자채볶음’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다시……. 알고 싶지 않다고? 나 역시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야기는 끝을 내야 하니까 말이다. 이런 경우에 미국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던데. 블라블라.
블라블라, 모두 실패했다. 나는 결국 감자채볶음을 포기했다.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쯤에 참다못한 감자가 채 썰리던 도마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말했던 것이다.
이 감자만도 못한 인간아!
순간 나는 왜 썰린 감자채가 아니라 반쯤 남아 있던 감자 덩어리가 그렇게 말을 한 것일까 묻고 싶었다. 감자채들이 입을 모으는 것보다 묵직한 덩어리가 한 마디 던지는 게 나아서? 아니면 감자채는 감자의 본질이 아니라서?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나는 하얗게 질린 감자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감자에게 감자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 역시 원해서 이렇게 생겨먹은 건 아니다. 감자에게 어찌할 수 없는 삶이 있는 것처럼 내게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해 하겠니, 못난 감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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