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7일 금요일

따귀를 낳았고



따귀를 낳았고

심아진



간호사의 뺨에 짝, 소리를 만들며 내가 등장한 순간, 어수선하던 병원이 일시에 조용해진다. 이상한 균질감이 크지 않은 실내를 차분하게 정돈한다. 신문지를 접었다 폈다 하며 절도 있게 손을 놀리던 노인과 도사린 쥐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중년의 여성, 그리고 방전된 휴대폰을 아쉬운 듯 만지작거리던 학생 등이 모두 미세하게 움직여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본다. 원체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정적에 적잖이 당황한다. 수습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사태에 대해 은선은 겨우 한 음절을 뱉어냈을 뿐이다.

“…말.”

나는 은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 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은선은 느닷없이 나와 맞닥뜨려 버린 것이다. 간호사의 왼쪽 뺨에 나의 흔적이 또렷이 남았다. 안 그래도 죽을상이던 간호사의 얼굴은 당황과 분노로 더욱 밉게 일그러져 있다. 은선은 말을 뱉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소리가 올라오는 통로 어디쯤이 솜으로 틀어 막혀 있기라도 한 듯, 애꿎은 목만 주물러대고 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한테 왜 이래? 왜?”

한쪽 뺨이 벌겋게 부푼 간호사는 완전히 평정심을 잃었다. 아마도 꽤나 모욕적이었을 나의 기습. 삼천 사백 원, 결제, 처방전 따위를 끊어 말하던 단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누군가의 동조를 호소하는 억울한 음성이지만, 위로 비슷한 것이라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동료의식을 가졌을 법한 다른 간호사는 진료실에 들어가 있으니 소란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나오지 못하는 것일 게다. 독감이나 장염에 지친 환자들이 간호사를 도와줄 수도 없는 듯하다. 은선의 행동에 동조하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너무 아파 참견할 힘이 없는 것인지 환자들 대부분은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빨개진 간호사의 뺨과 그에 못지않게 붉은 은선의 뺨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저런!

너무 늦었다 싶은 탄성 하나가 어디선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모호한 감탄사는, 제대로 된 호응을 얻지 못했을 때 빠르게 사라지고 마는 자의식처럼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만다. 은선은 거칠게 자신을 폭발시켰던 순간의 호기를 모두 잃었는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지난밤부터 떨리던 다리가 점점 더 심하게 떨린다. 나는 은선이 갑작스레 나와 조우하게 된 것이 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침을 넘길 뿐인데도 지저깨비들을 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깔끄러운 목과 뭉근히 달여지고 있는 듯한 달뜬 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두통. 감기가 아니라면 여태 세심하게 나의 접근을 살폈던 은선이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선은 나 때문에도 놀랐지만 방심한 자신에게 더 경악한다. 나는 오히려 차분한 기분으로 내가 만들어낸 것들을 지그시 응시한다. 가닥가닥 닳고 해어진 따귀의 아우라.



은선과 나는 많은 날을 함께 해왔다. 그녀가 철없었을 때, 사춘기였을 때, 세상의 썩은 내와 단내를 구별하기 시작하였을 때, 언제나 내가 같이 있었다. 그러나 은선은 내가 소탈하게 그녀를 대하는 것과는 달리, 나를 친근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반쯤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았고, 곧 도망 가버릴 듯한 자세로 거리를 두었다. 은선은 나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했고, 모르는 척하는 것이 반드시 편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듯 침울해 했다. 그러니 오늘 병원에서 은선이 취한 행동은 하나의 작은 혁명이었다. 완만하게 올라가던 혹은 내려가던 곡선이 느닷없이 방향을 틀게 되는 어떤 지점에서, 미분할 수 없는 세상을 마주한 것과 같았다. 어쩌면 은선은 낙인을 찍기라도 하려는 듯 잔혹해진 시간을 더 이상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은선이 어려서 외로운 것인지 외로워서 어린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시기에 처음 그녀를 만났다. 은선은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일곱 살 꼬마였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은선은 늘 무언가를 따지는 듯 혹은 무엇엔가 토라진 듯 외따로 혼자 있었다. 아직 누군가를 괴롭혀서 얻는 기쁨 같은 것을 모르는 아이들은, 특별히 심심할 때만 멀리 떨어져 있는 은선을 눈여겨볼 뿐이었다. 그들 중 수고롭게 은선을 불러들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선은 아직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새 고무줄뭉치를 들고서 사람보다 많은 나무들 사이를 쏘다니곤 했다. 은선의 동네는 사월이면 벚꽃들이 뭉게구름처럼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곤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꽃은 아쉽게도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다. 동네 아이들의 이와 입술은, 빨리 진 꽃을 보상이라도 하듯 금방 익는 열매 때문에 독처럼 까매지곤 하였다.

동네가 끝나는 오르막길 중턱에 해병대의 초소가 있었다. 은선은 돌멩이 몇 개를 모아 고갯길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놀면서 자주 초소를 바라보았다. 반들반들한 모자를 쓰고서 철문 앞을 지키는 군인 아저씨 때문이었다. 치렁치렁한 어깨장식과 가슴에서 반짝이는 배지들이 멋있게 보였다. 은선은 그의 몸에 붙어 있는 별이며 화살표, 네모 등을 땅에 그리며 반나절을 보냈다. 미동도 않을 것 같던 헌병은 이따금 하품을 하거나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군인을 따라 은선도 여러 번 하품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다 하였다. 은선과 작은 돌멩이들의 그림자가 점점 짧아져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똑같이 해가 움직이고 그림자가 짧아지는 시간에 은선은 벌떡 일어나 헌병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요.

앳된 얼굴의 젊은이는 놀라서 은선을 쳐다보았다.

버찌 좀 따주세요. 아저씨는 키가 크잖아요.

주변은 벚나무 천지였다. 초소로부터 올라가는 길을 따라, 또 내려가는 길을 따라 다양하게 굽은 나무들이 열을 지어 있었다. 나무의 열매에서 나는 달금한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은선은 멀쑥한 헌병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손이 닿지 않는 벚나무 가지를 향해 깡충 뛰며 야, 야 소리를 내었다. 스스로의 용기에 감탄하면서도 너무나 부끄러워, 은선의 얼굴은 잘 익은 열매만큼 검붉어졌다.

헌병은 한 동안 은선의 제자리 뛰기를 지켜보았다.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있던 작은 새들이 꼬마가 성가시다는 듯 멀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막 더워지기 시작하는 무렵이라 은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이윽고 헌병이 손을 움직였다. 하얀 장갑을 벗은 맨손이었다.

자, 이만큼이면 되겠어?

은선은 헌병에게 바짝 다가가 손바닥에 놓인 열매 몇 개를 헤아려 보았다. 그의 어깨와 가슴에 달린 알 수 없는 기호들을 살짝살짝 곁눈질 하면서.

고작 여덟 개인데요?

헌병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핀 뒤 가까이 있는 나뭇가지에 이리저리 손을 뻗었다. 너무 익은 열매는 그의 손이 닿자 따기도 전에 터져 버렸고, 너무 단단한 열매는 은선의 야무진 판단에 따라 버려졌다. 적당히 무르고 적당히 달콤한 열매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무표정하기만 하던 헌병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은선의 작은 손에 수북이 열매가 모였다.

와, 많다!

은선이 감탄을 하는데, 느닷없이 철썩 소리가 났다.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나였다. 조마조마해하며 둘을 지켜보던 나는 헌병의 상관이 다가오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상관은 씩씩대고 있었으므로 젊은 헌병이 혼쭐이 날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꼬마 은선에게도 그에게도 상황을 알려줄 수 없었다. 그럴 입장이 못 되었다. 사실 은밀하게 나를 불러낸 것은 헌병의 상관이 아니라 은선과 헌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력한 자신을 탓했지만 무력한 것이 내 탓만은 아니라는 것 또한 모르고 있지 않았다. 사실 은선과 헌병은 적절한 조심성을 발휘하여 나를 몰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이 지나치게 버찌 따는 것에 몰입했고, 너무 순수하게 햇살을 즐긴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일 초, 일 초가 절도 있게 드러눕는 것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상사는 헌병의 뺨을 정확하게 겨냥했다. 나라고 경악하는 그 자국, 나임에 틀림없다고 침을 뱉는 그 흔적이 젊은 군인의 볼에 또렷이 찍혔다.

근무 중에 뭐하는 거야?

상사의 군화가 연달아 헌병의 정강이를 강타했다. 은선은 양손에 있던 버찌를 어설프게 모아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버찌를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이 함께 달렸다. 겨우 일곱 살인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은선은 헌병을 엿보던 고갯길 모퉁이를 돌아 급히 몸을 숨겼다. 은선은 사납고 잔인하게 날뛰는 나의 소리를 들었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군인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어린 은선은 자신의 뺨이 얼얼해지는 것만 같았다.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물러진 버찌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붉고 검은 과즙이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땅을 적셨다. 부산스럽던 새들이 갑가기 조용해졌고, 짝짝거리는 소리만이 비현실적으로 울렸다. 은선은 너무 무서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헌병 아저씨를 구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화가 났다.

은선은 나무 열매를 꼭 쥐고서 이 모든 일들이 지나가기를, 애초부터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를 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탓이 아니기를 바랐다. 은선이 태어나기 전부터 벚나무는 가지를 뻗었고, 꽃눈을 흩날렸으며, 향을 뿜었을 터였다. 그런 것은 은선이 그렇게 하도록 혹은 되도록 명령하거나 부탁한 일이 아니었다. 결코.

어린 은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 순간에 내가 나타난 것인지, 어째서 버찌를 땄을 뿐인 아저씨가 물러진 버찌 열매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리사니를 잡지 못하는 은선의 눈에 나와 함께 범벅이 되어 쓰러진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은선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전속력으로 집을 향해 달렸다. 양 손을 지저분하게 물들이고서, 정성스레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을 버려둔 채였다. 일곱 살 꼬마는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은 버찌 한 움큼의 세상을 제대로 느끼며, 달리고 또 달렸다.



간호사는 새록새록 화가 나는지, 은선의 어깨를 거칠게 떠다민다.

“나한테 왜 그러냐니까?”

간호사는 끝까지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은선의 다리는 진동 청소기에 연결이 되 있기라도 한 듯 아까보다 더 심하게 떨린다. 머리는 타오르다 숫제 날아가 버릴 것만 같고, 귀에서는 끝없이 이명이 울린다. 은선은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말해야 한다. 아프고 힘들고 먹을 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에게 간호사가 되지 않게 반말을 써서 그랬다고 말해야 한다. 간호사도 의사도, 병원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왜 아픈지, 언제쯤 나을 수 있는지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고 항의해야만 한다. 하지만 은선의 성대는 또 다시 겨우 한 음절을 뱉어냈을 뿐이다.

“…말.”

어른들의 다툼에 호기심을 느낀 사내아이가 다가와 두 사람을 빤히 올려다본다. 점성이 강한 누런 콧물이 아이의 코와 입술 사이를 들락날락하고 있다. 흐리멍덩한 아이의 눈이 간호사와 은선에게 번갈아 고정된다. 은선은 할 수만 있다면 빨개진 얼굴을 둘둘 말아서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싶다.

나는 간호사와 은선의 사이 적절한 공간에서 부끄러움과 모멸감, 증오심 등을 적절하게 뒤섞는 중이다. 허섭스레기 같은 치기일 뿐이지만 잘만 포장하면 거룩한 분노로 보일 때가 있다. 결국 거기서 거기인 환멸이라도 고상한 체 하는 역설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가능하면 기분을 드러내지 않고 덤덤하게 내 일을 한다. 오해를 이해로, 진짜 이유를 가짜 변명으로, 책임감 없는 즉흥성을 우연하지 않은 필연성으로 바꾸기도 한다. 결코 내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은선은 그 다짐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던지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

간호사는 대답하지 않는 은선이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더욱 모욕하고 있다고 여기는지 화를 주체하지 못한다. 맞은 간호사는 때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고, 정작 때린 은선은 죄지은 사람처럼 시르죽어 있다. 사실 내가 나선 곳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흔하다. 누군가의 자긍심이 비슷한 정도의 자격지심으로 바뀌기도 하고, 파죽지세의 기력이 하찮은 객기 따위가 되기도 한다.

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떠세를 부리면서 실상은 아무 것도 되지 않은 채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어쩌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기에 잠시라도 상황을 즐기는 쪽을 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하도록 되어 있는 일을 해야만 하기에, 그저 ‘좋아한다’는 말로 어쩔 수 없는 비애를 무마시키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무력감에 젖은 채, 나는 은선과 간호사의 사이에 길게 드러누웠다. 어찌되었든 은선은 결국 이 순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내일, 올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떤 한 해에 반드시 이런 나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나는 은선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필연의 지점에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나, 결국 이쑤시개만큼의 가느다란 저항도 할 수 없는 나를 말이다.



은선은 한 차례의 경험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아이가 되었다. 사춘기가 가까워지는 나이임에도 나와 마주칠 만한 일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신비롭거나 극적인 일들이 감성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다는 듯이 멀찌감치 피해 다녔고, 조신하게 또박또박 걸을 수 있는 길에서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은선은 나를 두려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듯 약게 굴었다. 그녀는 나를 없다고 생각하면 없을 수 있다고 여겼으며, 실상 없지는 않더라도 얼마든지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래서 늘 내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쳐버리거나, 거추장스러운 거적때기처럼 나를 발로 차버리곤 하였다. 나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끈질긴 것 하나 빼고는 내세울 게 없는 나로서는 은선의 홀대 따위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미뤄지고 감춰지고 그 어떤 수모를 당해도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반드시 나타나고야 말기 때문이다. 매번 인식하기에는 너무 사소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큼 미미하지도 않은 적절한 무게감을 가지고, 나는 조심스럽게 은선의 주위를 맴돌았다.

열네 살 은선이 드디어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 사이에 나를 두게 되었다. 물론 은선이 나를 완벽하게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짙은 안개처럼 은선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안개는 멀리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것들은 늘 웬만큼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선명하지는 않아도 있는 것임에 분명한 나는 뚜렷하게 보이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 은선은 안개 사이로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공포에 떨곤 했다.

은선은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 아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은선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 아니므로 스스로 무죄하다 여겼다. 남자 아이가 애가 닳건 말건, 친구가 안절부절 속을 끓이건 말건 괘념치 않았다. 안개 속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내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은선은 그런 일은 친구와 남자 아이 둘이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어쩌면 은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 친구를 위하는 것이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자신이 헌병에게 다가간 일로, 그가 짐승처럼 맞았다는 사실이 너무 무겁게 은선의 어린 날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선은 외면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남자 아이는 몸이 더 달았고, 친구는 그 탓을 은선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결국 나는, 가장 적절한 순간에 또 다시 나타나고야 말았다. 학급 회장이었던 친구는 체육 수업 준비를 위해 줄을 세우고 있었다. 은선은 열을 맞추려는 친구의 권유를 가볍게 여기며 다른 친구와의 수다에 열중했다. 은선은 친구가 자신에게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은선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은선은 친구가 나약하고 비굴하다는 것에 화가 났다. 무기력하게 맞기만 했던 헌병처럼, 친구도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선은 한편으로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자신을 줄 세우기 위해 다시 한 번 팔을 잡아당길 때만 해도 아주 조금만 더 심통을 부릴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서운해 하는 친구에게 그저 심하지 않은 경고를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선은 십대의 우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나의 힘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에 내가, 응축되어 있던 내가 튀어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설마’라는 허세로 눌러버렸던 것이다.

친구가 한 번 더 은선을 잡아당겼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은선은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를 쓰느라, 완전무장을 한 채 솟구쳐오를 준비를 마친 나를 미처 보지 못했다. 친구가 신경질적으로 또 다시 은선의 몸을 잡아당겼을 때였다. 뿌리치려는 은선의 손톱이 친구의 맨 살을 아프게 긁었다. 정교한 그 순간, 나는 친구의 손바닥에서 은선의 얼굴까지 몸을 길게 뻗었다. 어쩌면 은선의 얼굴에서 친구의 손바닥으로 몸을 뻗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짧은 시간, 우리 모두를 둘러쌌던 안개는 걷혔다. 노련한 채찍의 포효처럼 가차 없는 소리가 났다. 친구도 은선도 모두 경악했다. 친구는 처음으로 나와 맞닥뜨려 놀랐고, 은선은 왜 또 자신이 나와 엮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얼이 빠졌다.

친구가 어찌나 정확하게 겨냥을 했든지, 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은선의 뺨에 가 붙었다. 은선은 허랑방탕한 탕자처럼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졌다. 그냥 고개만 꺾인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꺾였다. 그녀가 푸른 인조 잔디 위에 철퍼덕 쓰러지자, 친구는 곧바로 교실로 달려갔다.

높은 푸른 하늘과 넓은 초록 잔디 사이에 내가 있었다. 아이들이 온통 나를 바라보는 터에, 나는 황망하게도 외로웠다. 하지만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발가벗겨진 나를 드러낸 채 뻔뻔한 시간을 견뎠다. 견디는 것만이 유일하게 내가 잘 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은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원망어린 눈길로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세게 발로 밟았다.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관절이 으드득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미 나는 나의 일을 했고 누구도 그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게 내 탓은 아니라며 찔끔, 눈물을 흘렸다. 친구와 은선의 우정은 심하게 말라 갈라지고 깨진 찰흙처럼 못 쓰게 되고 말았다.

절뚝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는 은선의 시선에, 자기연민이 더해진 자조의 웃음이 서렸다. 그녀는 자신이 가졌던 하찮은 것,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는 그것들에 실망하였고, 아울러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은 나를 경멸하였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결코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며 나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다. 표독스러워진 은선으로 인해 나는 초라해졌고, 얼마간 저열한 것이 되었다. 허무해진 나는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으나 그것 또한 내게 허락된 일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질타의 눈초리와는 달리 그녀가 나를 간절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은선은 나를 잘 몰랐고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를 놓아주려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나를 부여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코 내가 떠나버릴 수 있도록 길을 내주지도 않았다. 그렇다. 나는 사실상 은선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자신을 지키고 싶을 때 내가 있다. 하지만 지켜낼 수 없을 때도 내가 있다.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뚜렷하게 탓할 만한 대상이 없을 때, 그리고 알량하게 저울질 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발차기나 주먹질과는 다른 내 본연의 형태로 어벌쩡하게 뛰어나오곤 한다. 순수한 폭력과 달리 나는 종종 비겁해진다. 그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를 때, 나는 비웃거나 애도하면서 엉너리를 치기도 한다. 나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되기도 하며 오지랖 넓게 여기와 저기를 두루 간섭하기도 한다. 나아가서 나는 손으로부터 뺨이 아니라 뺨으로부터 손으로도 이동해가며,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넘어서 하나의 기원으로도 향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창자를 끊어내서 기꺼이 줄넘기를 하는 광대가 된다. 울고 웃으면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된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우주의 끝까지 펼쳐진 비애 사이에서 나는 아주 잠시 약해졌다가 영원토록 강해진다. 그리하여 횃불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어두움이 농밀하게 응축된 지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는 첨예한 지점에서 나는 숨을 딱 멈추고 긴장하곤 한다. 긴장이 계속되는 한 나는 늘 살아있다.



진료실에서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막 진찰을 마친 환자가 나온다. 은선은 아직 지갑에 넣지 않고 있었던 신용카드를 간신히 챙겨 넣고 점퍼의 지퍼를 올린다. 한기가 들면서 다리의 떨림이 온 몸으로 번져온다. 의사가 정중하게 묻는다.

“무슨 일이시죠?”

그래, 그렇게 존댓말을 써야지. 은선은 시종일관 반말로 일관했던 간호사를 노려본다. 처방전. 싸인. 여기. 은선은 간호사의 무례한 태도에 모욕감을 느꼈다고, 아니 죽이고 싶은 증오를 느꼈다고 말하고 싶다. 아파서 의기소침해진 환자들을 찍어 누르는 듯한 태도가 될 법이나 하냐며 따져 묻고 싶다. 그녀는 나와 만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대해 천 가지 쯤 이유를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무력했을 뿐이라고 변명을 하고 싶다. 하지만 입술과 연결된 모든 기관들이 고열에 눌러 붙기라도 한 듯 기능을 하지 못한다. 소리는 목 아래 깊은 곳에서 길을 잃었음에 틀림없다.

은선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하자, 의사는 엄한 얼굴로 간호사를 채근한다.

“김간호사, 무슨 일이야?”

간호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상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간호사가 설명할 수 있는 정황이랬자 ‘계산을 해달라고 리더기를 내밀었을 뿐인데 갑자기 뺨을 맞았다’는 것이 전부다. 은선이 말을 하지 않으니 간호사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이상한 환자. 이유. 갑자기. 억울한. 내가 지녔던 애초의 의미는 점점 작아지고 궁색해진다. 나는 턱없는 폭력 한 조각이 되고 만다. 한심하게도 은선은 간호사의 변명에 조금씩 동조하고 있다. 그래, 그렇게까지 할 것까진 없었잖아. 은선은 간호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실 은선은 어떤 것을 이해한다기보다 형식과 의미의 층위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이해의 두께에 질려 있을 뿐이다. 은선은 점점 작게 웅크린다. 소심한 그녀의 이해라는 것은 밖으로 모험을 감행해 뻗어나가기보다 안으로 쪼그라들어 완벽히 숨어버릴 수 있기를 원한다. 그녀는 매우 쉽게 나를 다시 외면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의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를 그저 사소한 짜증이나 예민함으로 취급하면서 간호사에게 사과를 한다면, 언제 나와 마주쳤냐는 듯 고요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만큼이나 은선은 고집이 세고 또 한심할 만큼 여리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이 골목 저 골목 아무데서나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시껄렁한 무뢰배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내 연민과는 별개로 나는 언제나 있어야 할 그 장소, 정해진 그 시간에 나타날 뿐이다. 어쩌면 나는 필연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내고 싶어하는 모순 가득한 세상에서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는 신의 있는 동반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은선을 떠날 수 없고, 은선 역시 나를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은선은 여전히 나의 머리카락 한 올, 신발 끈 한 가닥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순환하는 길에서 뺨, 혹은 손은 사소한 거스러미에 지나지 않으며, 신경증이든 진지함이든 그저 부분적인 이유일 뿐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좋다. 어쨌거나 나는 여전히 은선의 옆에 있고, 지금은 그것만이 가장 중요하다.



친구와 절교한 후 은선은 자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으려 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다시 나와 마주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실의에 빠졌다. 군인 아저씨도 친구도 모두 나로 인해 잃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은선은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한층 자신감을 잃었다. 무언가를 해도, 하지 않아도 자신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무심한 하루하루의 기세에 눌렸다. 은선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무미건조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녀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상대는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게 나를 무시해도 내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은선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선은 결국 또 다시 나를 마주해야만 하였다. 역사 선생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교 소녀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사실, 내가 있건 없건, 나를 의식하건 않건 상관없는 일이다. 조심해서 되는 일도 아니며, 눌러서 막아지는 것도 아니다. 은선은 스스로의 사랑을 결코 풋사랑이라 여기지 않는 조숙한 열아홉 살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거의 잊은 듯 보였다.

은선은 역사 선생의 눈에 조금이라도 더 띄고 싶어서 학급의 회장이 되었다. 그녀는 식욕 왕성한 여고생들이 도시락 여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절절하게 역사 시간을 기다렸다. 싫어하던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것도 부모가 강요하는 이과를 선택하지 않은 것도, 모두 선생을 계속 보고 싶어서였다. 은선이 사랑하는 선생과 그 선생이 담당하는 과목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그녀는 조선시대의 과전법과 직전법의 차이를 줄줄이 암기했고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답험손실법의 구체적 규정을 모두 찾아 정리했다. 은선은 세밀하게 역사를 공부하면서 선생의 영혼 깊은 곳을 은밀히 알아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과제물을 걷어 가서 선생을 한 번 더 볼 때마다, 또 지시 사항을 들으며 가까이 서 있을 때마다 기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은선이 가장 기다리는 순간은 선생과 눈높이를 같이 하고 ‘차렷, 경례’라는 구령을 붙일 때였다. 앉아 있는 친구들 위로 선생과 자신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사를 나누는 짧은 시간에 은선은 온전히 선생과 하나가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였다. 은선은 그 날, 가슴이 너무 뛰어 선생의 얼굴을 보고 ‘차렷’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일어서기는 했으나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선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십대들의 터질 듯한 몸처럼 터무니없이 부풀어 올랐다. 일어서서 멍하니 있다가 친구들의 웃음이 터진 후에야 간신히 차렷이라는 말을 뱉었다. 울어버릴 것만 같아 ‘경례’라는 다음 말을 발음할 수 없었다. 은선의 마음을 알고 있는 친구들이 박장대소했다. 소녀의 마음을 모르는 선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차렷을 시도했다. 목소리가 소프라노 톤으로 높이 떠서 나왔다. 친구들이 더 크게 웃었다. 선생은 출석부를 반듯하게 세워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은선은 그 모습을 보고 또 다시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나치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느 순간 목에서 떨어져 나가 풍선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음성을 내기 위해 기를 썼다. 하지만 끝내 ‘경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선생은 은선을 대신해 구령을 붙였다. 친구들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은선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에게 멍청한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화가 났다. 여전히 자리에 앉지 않은 은선에게 선생은 ‘이제 그만’ 앉으라고 권했다. 교실이 또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어쩐지 은선은 앉을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다 바위가 되어버렸다는 전설 속 아둔한 여인처럼 다리가 굳어버렸다. 선생의 얼굴은 엄해져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앉아라. 친구들은 이제 웃지 않았다. 선생은 입술에 닿은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은선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 주변에서 웃음을 터뜨리던 친구들 중 누구도 선생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결코 돌이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의도도 허락하지 않은 채 내 길을 가고 있는 나를 예측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그악스럽게 그 자리를 점유한 채 숨을 죽였다. 은선은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저주하고 있었고 선생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자신의 몸을 경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야들야들한 여고생들의 살 냄새에 취한 나를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선생의 오해와 소녀의 격정이 충돌할 것을 예상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선의 가까이로 다가온 선생은 겨우 선생일 뿐인 자신의 인생을, 어쩌면 더 나은 꿈을 펼칠 수도 있었을 자신의 인생을 후회라도 하는 듯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앉을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은선은 자신이 왜 앉을 수 없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억울한 얼굴을 선생에게로 돌렸을 뿐이었다. 억울함을 건방짐으로 이해한 선생은 마지막이라는 듯 한 번 더 앉을 것을 명령했다. 가까스로 자제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이미 나를 외면할 수 없는 상태에 와 있었다. 똑같은 수업 내용, 야간 자율학습의 피곤, 박봉, 그리고 밀린 고지서와 같은 것들이 선생의 이마 주름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반듯하게 그의 옆에 섰다. 물론 은선을 동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처럼 내겐 아무런 힘도 없었다. 소녀의 눈물 어린, 설움 가득한 얼굴이 기어이 선생을 터뜨려 버리고야 말았다. 두텁게 더께 앉은 일상과 꿈의 켜들이 일제히 갈라지고 있었다.

은선은 머리라고 해야 할지 뺨이라고 해야 할지 정확하게 지칭할 수 없는 곳을 맞았다. 얼핏 보기에 심하게 꿀밤을 맞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분명히 나였다. 교묘하게 경계가 흩트려졌어도 때리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 모두 그것이 정확히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두 사람 사이에 제대로 자리를 잡는 순간, 둘의 입장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선생은 겁에 질렸고 제자는 당돌해졌다. 나는 물을 묻히지 않고도 물 위로 미끄러지는 소금쟁이처럼 가뿐하게 둘 사이를 오갔다. 초조해진 선생은 은선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자리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뜻밖의 모습으로 선생과 뒤엉키고 말았다. 절규에 가까운 은선의 비명이 뒤따랐는데, 선생의 볼에는 은선이 그간 경멸해 마지않았던 나의 자국이 생겨 있었다.

평생을 은선의 주위에서 어정거렸던 나로서도 결코 예측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나는 자진해서 나를 받아들인 은선 때문에 흥분하였으며, 자주 있지 않은 신선한 경험 때문에 잔뜩 들뜨고 말았다. 그 순간의 내 자취는 아름답진 않았지만 꽤나 정열적이었으며, 성숙하진 못 했지만 실로 감동적이었다. 곧 바로 후회하기 시작한 은선은 스스로를 저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은선이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 때문에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약간의 자괴감을 숨긴 채 호탕하게 기뻐하였다. 어쩐지 그 순간 이후로는 여태껏 한 번도 원해 본 적이 없는 것조차도 원할 수 있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좀 더 세상을 오래 산 선생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볼이 빨개진 그는 더 이상 억지로 은선을 앉히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은선과 나의 관계보다 자신과 나의 관계에 대해 더욱 민망해 하는 것 같았다. 선생은 그에게 남겨진 나의 흔적에 대해 은선을 나무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생은 자습이나 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허둥지둥 교실을 나갔다.

은선은 비통한 얼굴이었다. 변명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아무 말도 못 해서인지,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 같은 건 잠시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냉담해졌다. 어지간한 일에는 기죽지 않는 나였지만, 바로 전의 흡족한 마음 때문에 얼마간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은선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별개로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은선이 나를 밀어낼 처지는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기에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내 웃숨 소리가 그녀의 위벽을 자극했다. 은선은 배를 움켜쥐고 토할 것처럼 웩웩거리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여름 낮의 교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 흔한 매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가운데 어디선가 아주 작은 소리의 감탄사 하나가 흘러나왔을 뿐이다. 저런!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은선에게 사과한다.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한 상태 때문에 마치 먼 곳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환자분께서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셨는지 모르지만, 그만 화를 푸시죠.”

딱 이 만큼이었다면 은선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병원을 나섰을 것이다. 원래도 소심한데다 몸까지 아프니 만사가 귀찮아서라도 그대로 물러서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의 다음 말에 은선은 또 한 번 몽니를 부리게 되고 만다.

“우리 간호사가 여태 환자분하고 문제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말에는 간호사가 상식적이라는 뜻과 은선이 비상식적이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었고, 은선이 공연히 이상한 행동을 하여서 사실상 분란을 일으켰다는 비난이 암시되어 있었다. 은선은 버찌를 탐냈던 어린 시절부터 병원에 있는 지금까지 억울하게 나와 마주쳐야 했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린다. 이들은 늘 이런 식이다. 양보하는 척하면서 실은 경멸하고, 깍듯하게 대하지만 먼지만큼도 여기지 않는다. 은선은 온 몸의 힘을 쥐어짜내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도저히 이대로는 그만둘 수가 없다. 그럴 것이다. 내가 있는 한 은선은 가기로 예정되어 있는 곳까지 반드시 가야만 할 것이다. 결국 얼마간 추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곳까지 가보아야만 끝이 날 것이다. 그녀는 성대 깊이 막혀 있던 솜뭉치를 필사의 의지로 뽑아낸다.

“그래서 환자 아무에게나 반말을 지껄이나요?”

드디어 말이 터져 나온다.

“몸도 아파 죽겠는데, 내 돈 내고 치료 받으러 와서, 내가 왜 길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만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죠?”

드디어 항변을 시작한 은선은 그러나 열에 들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앞뒤가 맞게 말하고 있는지, 이유를 충분히 밝히고 있는지, 스스로 떠드는 말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와 각종 세균을 뿜어내고 있을 환자들의 구취, 몸 냄새가 은선에게 멀미를 일으킨다. 은선은 악을 쓴다.

“왜 아무한테나 반말을 쓰냐고? 왜 아무 짓도 안한 나를 괴롭히냐고!”

은선은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였던 간호사를 향해 보란 듯이 정확한 반말을 던진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그 간호사가 사람들에게 내내 뒷말을 잘라먹으며 불쾌하게 대했던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간호사는 은선이 진료를 위해 지루하게 기다린 시간, 열에 들뜬 머리, 미치도록 아픈 귀, 찢어질 듯한 목 등 모든 것에 책임이 있음에 틀림없다. 은선은 암기라도 하듯 그런 사실을 반복해서 머릿속에 나열한다. 간호사는 분명히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은선은 사실, 반말 같은 것이 중요한 빌미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간호사의 인격이라 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 한들 은선이 그것을 탓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은선도 눈치 채지 못하게, 다른 아무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는 내가 있었다.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나는 다른 어느 곳으로도 갈 수가 없었다. 은선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뭉크러진 버찌를 손에 들고 모퉁이까지 또 집까지 도망쳤던 그때처럼, 은선은 뒤돌아볼 수 없는 길을 달렸던 것이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낸다. 이 여자가 환자를 함부로 대했다구요! 하지만 다른 환자들은 자신들은 그런 취급을 받지 않았다는 듯 멀뚱히 앉아 있을 뿐이다. 마치 간호사가 은선에게만 반말을 했으며, 아마도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듯 조용하다. 환자들도 얄밉고, 의사, 간호사들도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선은 병원에 있는 모두를 욕하고 싶다. 아프고 나약한 사람들은 절대 서로 뭉치지 않는다. 항상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벌어지는 상황에 몸을 내맡길 뿐이다. 그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은선은 나라도 끌어들여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말이 안 된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은선은 고집스러운 말의 성, 그래서 더 초라해져 가는 의미의 성을 쌓는다. 의사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선을 만류한다.

“환자분, 진정하시죠. 김 간호사, 사과드려.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

간호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게 아니라…….”

“뭐가 그게 아니라는 거지? 어서 사과부터 하라고. 사과해.”

은선은 머리가 아파 견딜 수가 없다. 이대로 더 뜨거워지다가는 성냥개비처럼 순식간에 머리에 불이 붙어버릴 것만 같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

간호사가 울먹인다. 은선은 끝까지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간호사를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몸을 웅크린 채 은선과 다른 사람들의 다툼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던 나를 말이다. 나는 은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도 정상이 아닌 몸 상태를 핑계 삼아 내가 활약하는 것을 보게 되어 얼마쯤 기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은선을 향해 어색하게 웃는다. 그녀는 자신이 옳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은선은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하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커다란 쇠망치에 머리가 짓이겨지고 있기라도 한 듯 두통이 극에 달한다. 혈관이며 세포가 죄다 터져 나가버릴 것만 같다. 떨리던 다리, 지끈거리던 머리, 힘 하나 없던 근육들이 일시에 같은 지점에서 만나 딱 멈추어서는 순간, 은선은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 것 같은데, 은선은 그 와중에도 자신이 내지른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잠시 하며 그대로 기절하고 만다. 내가 있던 자리의 끝이 대개 그렇듯, 순간 조용해지면서 무의미해지고 만다.



은선은 그야말로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몇 달을 더 선생의 얼굴을 봐야하는 일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입 안 가득 넘어온 토사물을 뱉어내지 못하고 도로 삼켜야만 하는 상황처럼 곤욕스러웠다. 은선은 버텨내기 위해 기억을 뭉개버렸다. 반짝거리는 배지를 달고 있던 키 큰 헌병도,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그리고 아마도 자신을 꽤 좋아했던 친구도, 역사 선생님도 모두 잊으려고 애를 썼다. 무엇보다 추억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낼 내가 두려웠기에, 사력을 다해 기억을 지웠다. 쉽지 않았지만 나를 못 본 체해야만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여러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친구를 견뎌야 했을 때도, 직상 상사 간의 싸움 때문에 엉뚱하게 피해를 입었을 때도, 애초부터 흐릿한 윤리를 마지못해 따라가야만 했을 때도 은선은 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결코 내게서 급습을 받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주위를 살폈고, 우직하게 노력했다. 아마 이렇게 몸이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열에 들떠 있지만 않았더라도, 은선은 한동안 더 나를 멀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나를 제대로 보지 않는 상태로 오롯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아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깨어났을 때, 은선은 병원의 간이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동시에 자신이 의사와 간호사를 향해 소리를 지르다 쓰러진 기억이 떠오르면서 겸연쩍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벌써 해가 진 것인지, 창밖이 캄캄하다. 혼자 낯선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에 무서움이 몰려온다. 당장 나가고 싶지만 팔에 꽂힌 바늘을 빼낼 수가 없다. 은선은 작은 소리로 사람을 불러 본다.

“저기요.”

딱히 누구를 지칭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부르는 게 분명한 소리를 내며 은선은 신기하게 몸이 좋아진 것을 느낀다. 우선 침 삼키기도 어렵던 목이 가라앉았음을 알 수 있다. 열도 내린 것 같다. 더 이상 몸이 떨리지 않고, 두통도 사라졌다. 수액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은선은 팔과 연결된 투명한 비닐 주머니를 보며, 나를 떠올린다. 어떻게 나와 함께 그런 진창을 뒹굴 수 있었는지, 무안하기 짝이 없다.

쪼그라든 수액 주머니와 팔에 꽂혀 있는 바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해 보려고 애를 쓰는데, 김간호사라 불리던 그 간호사가 들어온다.

“좀 어때요?”

더 이상 반말이 아닌 존댓말이다. 은선은 대답할 말이 없어 입술만 달싹이다 몸을 일으킨다. 몸이 나아진데다 푹 자고 일어났기 때문인지, 잠시 낙관적인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를 외면하려고만 했던 원래의 은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두른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오래전부터 내가 함께 있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녀와 함께 있을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 그녀가 가엽다. 나는 아득한 영원에 닿아있는 나의 길을 목도리처럼 그녀에게 둘러 준다. 은선이 나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나는 끝까지 그녀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간호사가 바늘과 수액 주머니를 정리한다. 은선은 자신과 간호사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이 모든 것이 악의를 품고서 무례하게 자신을 몰아붙인 나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은선은 결코 끝없이 반복되고 재생되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살짝 약이 오른다.

“네 시간쯤 주무셨어요.”

간호사는 부드럽게 말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부루퉁하다. 은선은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가뿐하다.

“저, 아까…….”

은선은 나에 관해 말을 꺼내려다 멈추고 만다. 그렇게 격렬했던 감정에 대해 죄송하다든가 실수라고 한다면, 모든 게 지나치게 가벼워지고 말 것 같아서다. 은선은 자신이 경솔해서 내게 의지한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싶다. 결코 성격이 나쁘거나 거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다. 하지만 변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쉽게 포기한다.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간호사의 왼쪽 뺨이 가시처럼 눈에 와 박힌다. 은선은 자신의 힘이 그렇게 세었던가 싶어 다시 자괴감에 빠진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간호사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받는다.

“알아요. 환자분 중이염 상태가 심해서 그렇대요. 항생제랑 투여했고, 약도 제가 대신 받아뒀으니 드시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네?”

은선은 간호사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한다.

“제가 반말을 쓴 게 아니라, 손님 귀 상태랑 몸 상태가 좀 안 좋으셨던 거예요. 물론 제가 사랑니 때문에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탓도 있어요.”

간호사는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치통의 반증이기라도 하다는 듯 은선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간호사의 왼쪽 볼은 맞아서 부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불거져 있다. 은선은 주변을 맴돌던 나를 와락 움켜잡는다. 그녀의 작고 축축한 손이 내 목을 세게 옭죈다. 나는 나를 못 보고 있는 것 같았던 그녀가 정확하게 나를 잡았다는 사실이 과히 유쾌하지만은 않다. 종종 그랬듯 나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호소하려 한다. 하지만 은선은 손에 힘을 더해 내가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일곱 살 꼬마 때부터 이미 내 길에 들어와 있었던 그녀를 쫓아다니느라 나 역시 힘들었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녀의 힘이 어찌나 센지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나는 헌병을 때렸던 상사와 은선의 친구, 선생님, 그리고 다른 많은 일들에 대해서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주 많다. 은선이 원한다면 죄다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일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 어떤 것도 무화시켜버리는 우연의 길 위에서, 변명과 치졸함이 난무하는 필연의 길 위에서 나 역시 새로이 진화하는 나를 보았을 뿐이라고. 내가 나를 낳았고, 그 내가 또 다른 나를 낳았으며, 영원히 낳고 낳았을 뿐이라고.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비슷하고, 비슷하지만 또 조금씩 다른 그 안개 낀 길에 대해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은선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백과사전처럼 몽롱한 나에 대해, 자기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가장 시시한 제스처도 마다하지 않는 나에 대해, 그리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다가 종종 우스워지기도 하는 나에 대해 아직도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은선은 쩔쩔매며 옷을 찾아 입고, 간호사에게 고개를 까딱한다. 사랑니로 부은 간호사의 뺨을 다시 보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병원을 나선다. 은선은 이제 다시 나를 멀리 쫓아버린다. 나를 조금쯤 알게 되었을 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고집을 부린다. 나는 세게 눌린 목을 주무르며 기를 쓰고 그녀를 쫓아간다. 은선은 평소처럼 발걸음을 재게 놀려 나로부터 도망간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에 유의미한 간격이 생긴다. 나는 은선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내 이야기를 한다. 아주 조금 가벼울 수 있는, 하지만 결코 우습지는 않은 나, 따귀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끝. <원고지11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