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7일 금요일

따귀를 낳았고



따귀를 낳았고

심아진



간호사의 뺨에 짝, 소리를 만들며 내가 등장한 순간, 어수선하던 병원이 일시에 조용해진다. 이상한 균질감이 크지 않은 실내를 차분하게 정돈한다. 신문지를 접었다 폈다 하며 절도 있게 손을 놀리던 노인과 도사린 쥐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중년의 여성, 그리고 방전된 휴대폰을 아쉬운 듯 만지작거리던 학생 등이 모두 미세하게 움직여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본다. 원체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정적에 적잖이 당황한다. 수습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사태에 대해 은선은 겨우 한 음절을 뱉어냈을 뿐이다.

“…말.”

나는 은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 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은선은 느닷없이 나와 맞닥뜨려 버린 것이다. 간호사의 왼쪽 뺨에 나의 흔적이 또렷이 남았다. 안 그래도 죽을상이던 간호사의 얼굴은 당황과 분노로 더욱 밉게 일그러져 있다. 은선은 말을 뱉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소리가 올라오는 통로 어디쯤이 솜으로 틀어 막혀 있기라도 한 듯, 애꿎은 목만 주물러대고 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한테 왜 이래? 왜?”

한쪽 뺨이 벌겋게 부푼 간호사는 완전히 평정심을 잃었다. 아마도 꽤나 모욕적이었을 나의 기습. 삼천 사백 원, 결제, 처방전 따위를 끊어 말하던 단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누군가의 동조를 호소하는 억울한 음성이지만, 위로 비슷한 것이라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동료의식을 가졌을 법한 다른 간호사는 진료실에 들어가 있으니 소란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나오지 못하는 것일 게다. 독감이나 장염에 지친 환자들이 간호사를 도와줄 수도 없는 듯하다. 은선의 행동에 동조하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너무 아파 참견할 힘이 없는 것인지 환자들 대부분은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빨개진 간호사의 뺨과 그에 못지않게 붉은 은선의 뺨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저런!

너무 늦었다 싶은 탄성 하나가 어디선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모호한 감탄사는, 제대로 된 호응을 얻지 못했을 때 빠르게 사라지고 마는 자의식처럼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만다. 은선은 거칠게 자신을 폭발시켰던 순간의 호기를 모두 잃었는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지난밤부터 떨리던 다리가 점점 더 심하게 떨린다. 나는 은선이 갑작스레 나와 조우하게 된 것이 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침을 넘길 뿐인데도 지저깨비들을 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깔끄러운 목과 뭉근히 달여지고 있는 듯한 달뜬 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두통. 감기가 아니라면 여태 세심하게 나의 접근을 살폈던 은선이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선은 나 때문에도 놀랐지만 방심한 자신에게 더 경악한다. 나는 오히려 차분한 기분으로 내가 만들어낸 것들을 지그시 응시한다. 가닥가닥 닳고 해어진 따귀의 아우라.



은선과 나는 많은 날을 함께 해왔다. 그녀가 철없었을 때, 사춘기였을 때, 세상의 썩은 내와 단내를 구별하기 시작하였을 때, 언제나 내가 같이 있었다. 그러나 은선은 내가 소탈하게 그녀를 대하는 것과는 달리, 나를 친근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반쯤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았고, 곧 도망 가버릴 듯한 자세로 거리를 두었다. 은선은 나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했고, 모르는 척하는 것이 반드시 편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듯 침울해 했다. 그러니 오늘 병원에서 은선이 취한 행동은 하나의 작은 혁명이었다. 완만하게 올라가던 혹은 내려가던 곡선이 느닷없이 방향을 틀게 되는 어떤 지점에서, 미분할 수 없는 세상을 마주한 것과 같았다. 어쩌면 은선은 낙인을 찍기라도 하려는 듯 잔혹해진 시간을 더 이상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은선이 어려서 외로운 것인지 외로워서 어린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시기에 처음 그녀를 만났다. 은선은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일곱 살 꼬마였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은선은 늘 무언가를 따지는 듯 혹은 무엇엔가 토라진 듯 외따로 혼자 있었다. 아직 누군가를 괴롭혀서 얻는 기쁨 같은 것을 모르는 아이들은, 특별히 심심할 때만 멀리 떨어져 있는 은선을 눈여겨볼 뿐이었다. 그들 중 수고롭게 은선을 불러들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선은 아직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새 고무줄뭉치를 들고서 사람보다 많은 나무들 사이를 쏘다니곤 했다. 은선의 동네는 사월이면 벚꽃들이 뭉게구름처럼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곤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꽃은 아쉽게도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다. 동네 아이들의 이와 입술은, 빨리 진 꽃을 보상이라도 하듯 금방 익는 열매 때문에 독처럼 까매지곤 하였다.

동네가 끝나는 오르막길 중턱에 해병대의 초소가 있었다. 은선은 돌멩이 몇 개를 모아 고갯길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놀면서 자주 초소를 바라보았다. 반들반들한 모자를 쓰고서 철문 앞을 지키는 군인 아저씨 때문이었다. 치렁치렁한 어깨장식과 가슴에서 반짝이는 배지들이 멋있게 보였다. 은선은 그의 몸에 붙어 있는 별이며 화살표, 네모 등을 땅에 그리며 반나절을 보냈다. 미동도 않을 것 같던 헌병은 이따금 하품을 하거나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군인을 따라 은선도 여러 번 하품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다 하였다. 은선과 작은 돌멩이들의 그림자가 점점 짧아져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똑같이 해가 움직이고 그림자가 짧아지는 시간에 은선은 벌떡 일어나 헌병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요.

앳된 얼굴의 젊은이는 놀라서 은선을 쳐다보았다.

버찌 좀 따주세요. 아저씨는 키가 크잖아요.

주변은 벚나무 천지였다. 초소로부터 올라가는 길을 따라, 또 내려가는 길을 따라 다양하게 굽은 나무들이 열을 지어 있었다. 나무의 열매에서 나는 달금한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은선은 멀쑥한 헌병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손이 닿지 않는 벚나무 가지를 향해 깡충 뛰며 야, 야 소리를 내었다. 스스로의 용기에 감탄하면서도 너무나 부끄러워, 은선의 얼굴은 잘 익은 열매만큼 검붉어졌다.

헌병은 한 동안 은선의 제자리 뛰기를 지켜보았다.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있던 작은 새들이 꼬마가 성가시다는 듯 멀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막 더워지기 시작하는 무렵이라 은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이윽고 헌병이 손을 움직였다. 하얀 장갑을 벗은 맨손이었다.

자, 이만큼이면 되겠어?

은선은 헌병에게 바짝 다가가 손바닥에 놓인 열매 몇 개를 헤아려 보았다. 그의 어깨와 가슴에 달린 알 수 없는 기호들을 살짝살짝 곁눈질 하면서.

고작 여덟 개인데요?

헌병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핀 뒤 가까이 있는 나뭇가지에 이리저리 손을 뻗었다. 너무 익은 열매는 그의 손이 닿자 따기도 전에 터져 버렸고, 너무 단단한 열매는 은선의 야무진 판단에 따라 버려졌다. 적당히 무르고 적당히 달콤한 열매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무표정하기만 하던 헌병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은선의 작은 손에 수북이 열매가 모였다.

와, 많다!

은선이 감탄을 하는데, 느닷없이 철썩 소리가 났다.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나였다. 조마조마해하며 둘을 지켜보던 나는 헌병의 상관이 다가오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상관은 씩씩대고 있었으므로 젊은 헌병이 혼쭐이 날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꼬마 은선에게도 그에게도 상황을 알려줄 수 없었다. 그럴 입장이 못 되었다. 사실 은밀하게 나를 불러낸 것은 헌병의 상관이 아니라 은선과 헌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력한 자신을 탓했지만 무력한 것이 내 탓만은 아니라는 것 또한 모르고 있지 않았다. 사실 은선과 헌병은 적절한 조심성을 발휘하여 나를 몰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이 지나치게 버찌 따는 것에 몰입했고, 너무 순수하게 햇살을 즐긴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일 초, 일 초가 절도 있게 드러눕는 것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상사는 헌병의 뺨을 정확하게 겨냥했다. 나라고 경악하는 그 자국, 나임에 틀림없다고 침을 뱉는 그 흔적이 젊은 군인의 볼에 또렷이 찍혔다.

근무 중에 뭐하는 거야?

상사의 군화가 연달아 헌병의 정강이를 강타했다. 은선은 양손에 있던 버찌를 어설프게 모아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버찌를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이 함께 달렸다. 겨우 일곱 살인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은선은 헌병을 엿보던 고갯길 모퉁이를 돌아 급히 몸을 숨겼다. 은선은 사납고 잔인하게 날뛰는 나의 소리를 들었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군인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어린 은선은 자신의 뺨이 얼얼해지는 것만 같았다.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물러진 버찌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붉고 검은 과즙이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땅을 적셨다. 부산스럽던 새들이 갑가기 조용해졌고, 짝짝거리는 소리만이 비현실적으로 울렸다. 은선은 너무 무서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헌병 아저씨를 구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화가 났다.

은선은 나무 열매를 꼭 쥐고서 이 모든 일들이 지나가기를, 애초부터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를 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탓이 아니기를 바랐다. 은선이 태어나기 전부터 벚나무는 가지를 뻗었고, 꽃눈을 흩날렸으며, 향을 뿜었을 터였다. 그런 것은 은선이 그렇게 하도록 혹은 되도록 명령하거나 부탁한 일이 아니었다. 결코.

어린 은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 순간에 내가 나타난 것인지, 어째서 버찌를 땄을 뿐인 아저씨가 물러진 버찌 열매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리사니를 잡지 못하는 은선의 눈에 나와 함께 범벅이 되어 쓰러진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은선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전속력으로 집을 향해 달렸다. 양 손을 지저분하게 물들이고서, 정성스레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을 버려둔 채였다. 일곱 살 꼬마는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은 버찌 한 움큼의 세상을 제대로 느끼며, 달리고 또 달렸다.



간호사는 새록새록 화가 나는지, 은선의 어깨를 거칠게 떠다민다.

“나한테 왜 그러냐니까?”

간호사는 끝까지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은선의 다리는 진동 청소기에 연결이 되 있기라도 한 듯 아까보다 더 심하게 떨린다. 머리는 타오르다 숫제 날아가 버릴 것만 같고, 귀에서는 끝없이 이명이 울린다. 은선은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말해야 한다. 아프고 힘들고 먹을 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에게 간호사가 되지 않게 반말을 써서 그랬다고 말해야 한다. 간호사도 의사도, 병원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왜 아픈지, 언제쯤 나을 수 있는지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고 항의해야만 한다. 하지만 은선의 성대는 또 다시 겨우 한 음절을 뱉어냈을 뿐이다.

“…말.”

어른들의 다툼에 호기심을 느낀 사내아이가 다가와 두 사람을 빤히 올려다본다. 점성이 강한 누런 콧물이 아이의 코와 입술 사이를 들락날락하고 있다. 흐리멍덩한 아이의 눈이 간호사와 은선에게 번갈아 고정된다. 은선은 할 수만 있다면 빨개진 얼굴을 둘둘 말아서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싶다.

나는 간호사와 은선의 사이 적절한 공간에서 부끄러움과 모멸감, 증오심 등을 적절하게 뒤섞는 중이다. 허섭스레기 같은 치기일 뿐이지만 잘만 포장하면 거룩한 분노로 보일 때가 있다. 결국 거기서 거기인 환멸이라도 고상한 체 하는 역설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가능하면 기분을 드러내지 않고 덤덤하게 내 일을 한다. 오해를 이해로, 진짜 이유를 가짜 변명으로, 책임감 없는 즉흥성을 우연하지 않은 필연성으로 바꾸기도 한다. 결코 내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은선은 그 다짐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던지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

간호사는 대답하지 않는 은선이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더욱 모욕하고 있다고 여기는지 화를 주체하지 못한다. 맞은 간호사는 때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고, 정작 때린 은선은 죄지은 사람처럼 시르죽어 있다. 사실 내가 나선 곳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흔하다. 누군가의 자긍심이 비슷한 정도의 자격지심으로 바뀌기도 하고, 파죽지세의 기력이 하찮은 객기 따위가 되기도 한다.

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떠세를 부리면서 실상은 아무 것도 되지 않은 채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어쩌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기에 잠시라도 상황을 즐기는 쪽을 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하도록 되어 있는 일을 해야만 하기에, 그저 ‘좋아한다’는 말로 어쩔 수 없는 비애를 무마시키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무력감에 젖은 채, 나는 은선과 간호사의 사이에 길게 드러누웠다. 어찌되었든 은선은 결국 이 순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내일, 올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떤 한 해에 반드시 이런 나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나는 은선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필연의 지점에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나, 결국 이쑤시개만큼의 가느다란 저항도 할 수 없는 나를 말이다.



은선은 한 차례의 경험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아이가 되었다. 사춘기가 가까워지는 나이임에도 나와 마주칠 만한 일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신비롭거나 극적인 일들이 감성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다는 듯이 멀찌감치 피해 다녔고, 조신하게 또박또박 걸을 수 있는 길에서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은선은 나를 두려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듯 약게 굴었다. 그녀는 나를 없다고 생각하면 없을 수 있다고 여겼으며, 실상 없지는 않더라도 얼마든지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래서 늘 내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쳐버리거나, 거추장스러운 거적때기처럼 나를 발로 차버리곤 하였다. 나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끈질긴 것 하나 빼고는 내세울 게 없는 나로서는 은선의 홀대 따위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미뤄지고 감춰지고 그 어떤 수모를 당해도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반드시 나타나고야 말기 때문이다. 매번 인식하기에는 너무 사소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큼 미미하지도 않은 적절한 무게감을 가지고, 나는 조심스럽게 은선의 주위를 맴돌았다.

열네 살 은선이 드디어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 사이에 나를 두게 되었다. 물론 은선이 나를 완벽하게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짙은 안개처럼 은선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안개는 멀리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것들은 늘 웬만큼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선명하지는 않아도 있는 것임에 분명한 나는 뚜렷하게 보이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 은선은 안개 사이로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공포에 떨곤 했다.

은선은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 아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은선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 아니므로 스스로 무죄하다 여겼다. 남자 아이가 애가 닳건 말건, 친구가 안절부절 속을 끓이건 말건 괘념치 않았다. 안개 속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내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은선은 그런 일은 친구와 남자 아이 둘이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어쩌면 은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 친구를 위하는 것이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자신이 헌병에게 다가간 일로, 그가 짐승처럼 맞았다는 사실이 너무 무겁게 은선의 어린 날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선은 외면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남자 아이는 몸이 더 달았고, 친구는 그 탓을 은선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결국 나는, 가장 적절한 순간에 또 다시 나타나고야 말았다. 학급 회장이었던 친구는 체육 수업 준비를 위해 줄을 세우고 있었다. 은선은 열을 맞추려는 친구의 권유를 가볍게 여기며 다른 친구와의 수다에 열중했다. 은선은 친구가 자신에게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은선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은선은 친구가 나약하고 비굴하다는 것에 화가 났다. 무기력하게 맞기만 했던 헌병처럼, 친구도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선은 한편으로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자신을 줄 세우기 위해 다시 한 번 팔을 잡아당길 때만 해도 아주 조금만 더 심통을 부릴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서운해 하는 친구에게 그저 심하지 않은 경고를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선은 십대의 우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나의 힘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에 내가, 응축되어 있던 내가 튀어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설마’라는 허세로 눌러버렸던 것이다.

친구가 한 번 더 은선을 잡아당겼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은선은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를 쓰느라, 완전무장을 한 채 솟구쳐오를 준비를 마친 나를 미처 보지 못했다. 친구가 신경질적으로 또 다시 은선의 몸을 잡아당겼을 때였다. 뿌리치려는 은선의 손톱이 친구의 맨 살을 아프게 긁었다. 정교한 그 순간, 나는 친구의 손바닥에서 은선의 얼굴까지 몸을 길게 뻗었다. 어쩌면 은선의 얼굴에서 친구의 손바닥으로 몸을 뻗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짧은 시간, 우리 모두를 둘러쌌던 안개는 걷혔다. 노련한 채찍의 포효처럼 가차 없는 소리가 났다. 친구도 은선도 모두 경악했다. 친구는 처음으로 나와 맞닥뜨려 놀랐고, 은선은 왜 또 자신이 나와 엮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얼이 빠졌다.

친구가 어찌나 정확하게 겨냥을 했든지, 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은선의 뺨에 가 붙었다. 은선은 허랑방탕한 탕자처럼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졌다. 그냥 고개만 꺾인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꺾였다. 그녀가 푸른 인조 잔디 위에 철퍼덕 쓰러지자, 친구는 곧바로 교실로 달려갔다.

높은 푸른 하늘과 넓은 초록 잔디 사이에 내가 있었다. 아이들이 온통 나를 바라보는 터에, 나는 황망하게도 외로웠다. 하지만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발가벗겨진 나를 드러낸 채 뻔뻔한 시간을 견뎠다. 견디는 것만이 유일하게 내가 잘 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은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원망어린 눈길로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세게 발로 밟았다.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관절이 으드득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미 나는 나의 일을 했고 누구도 그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게 내 탓은 아니라며 찔끔, 눈물을 흘렸다. 친구와 은선의 우정은 심하게 말라 갈라지고 깨진 찰흙처럼 못 쓰게 되고 말았다.

절뚝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는 은선의 시선에, 자기연민이 더해진 자조의 웃음이 서렸다. 그녀는 자신이 가졌던 하찮은 것,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는 그것들에 실망하였고, 아울러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은 나를 경멸하였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결코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며 나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다. 표독스러워진 은선으로 인해 나는 초라해졌고, 얼마간 저열한 것이 되었다. 허무해진 나는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으나 그것 또한 내게 허락된 일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질타의 눈초리와는 달리 그녀가 나를 간절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은선은 나를 잘 몰랐고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를 놓아주려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나를 부여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코 내가 떠나버릴 수 있도록 길을 내주지도 않았다. 그렇다. 나는 사실상 은선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자신을 지키고 싶을 때 내가 있다. 하지만 지켜낼 수 없을 때도 내가 있다.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뚜렷하게 탓할 만한 대상이 없을 때, 그리고 알량하게 저울질 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발차기나 주먹질과는 다른 내 본연의 형태로 어벌쩡하게 뛰어나오곤 한다. 순수한 폭력과 달리 나는 종종 비겁해진다. 그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를 때, 나는 비웃거나 애도하면서 엉너리를 치기도 한다. 나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되기도 하며 오지랖 넓게 여기와 저기를 두루 간섭하기도 한다. 나아가서 나는 손으로부터 뺨이 아니라 뺨으로부터 손으로도 이동해가며,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넘어서 하나의 기원으로도 향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창자를 끊어내서 기꺼이 줄넘기를 하는 광대가 된다. 울고 웃으면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된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우주의 끝까지 펼쳐진 비애 사이에서 나는 아주 잠시 약해졌다가 영원토록 강해진다. 그리하여 횃불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어두움이 농밀하게 응축된 지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는 첨예한 지점에서 나는 숨을 딱 멈추고 긴장하곤 한다. 긴장이 계속되는 한 나는 늘 살아있다.



진료실에서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막 진찰을 마친 환자가 나온다. 은선은 아직 지갑에 넣지 않고 있었던 신용카드를 간신히 챙겨 넣고 점퍼의 지퍼를 올린다. 한기가 들면서 다리의 떨림이 온 몸으로 번져온다. 의사가 정중하게 묻는다.

“무슨 일이시죠?”

그래, 그렇게 존댓말을 써야지. 은선은 시종일관 반말로 일관했던 간호사를 노려본다. 처방전. 싸인. 여기. 은선은 간호사의 무례한 태도에 모욕감을 느꼈다고, 아니 죽이고 싶은 증오를 느꼈다고 말하고 싶다. 아파서 의기소침해진 환자들을 찍어 누르는 듯한 태도가 될 법이나 하냐며 따져 묻고 싶다. 그녀는 나와 만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대해 천 가지 쯤 이유를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무력했을 뿐이라고 변명을 하고 싶다. 하지만 입술과 연결된 모든 기관들이 고열에 눌러 붙기라도 한 듯 기능을 하지 못한다. 소리는 목 아래 깊은 곳에서 길을 잃었음에 틀림없다.

은선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하자, 의사는 엄한 얼굴로 간호사를 채근한다.

“김간호사, 무슨 일이야?”

간호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상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간호사가 설명할 수 있는 정황이랬자 ‘계산을 해달라고 리더기를 내밀었을 뿐인데 갑자기 뺨을 맞았다’는 것이 전부다. 은선이 말을 하지 않으니 간호사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이상한 환자. 이유. 갑자기. 억울한. 내가 지녔던 애초의 의미는 점점 작아지고 궁색해진다. 나는 턱없는 폭력 한 조각이 되고 만다. 한심하게도 은선은 간호사의 변명에 조금씩 동조하고 있다. 그래, 그렇게까지 할 것까진 없었잖아. 은선은 간호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실 은선은 어떤 것을 이해한다기보다 형식과 의미의 층위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이해의 두께에 질려 있을 뿐이다. 은선은 점점 작게 웅크린다. 소심한 그녀의 이해라는 것은 밖으로 모험을 감행해 뻗어나가기보다 안으로 쪼그라들어 완벽히 숨어버릴 수 있기를 원한다. 그녀는 매우 쉽게 나를 다시 외면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의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를 그저 사소한 짜증이나 예민함으로 취급하면서 간호사에게 사과를 한다면, 언제 나와 마주쳤냐는 듯 고요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만큼이나 은선은 고집이 세고 또 한심할 만큼 여리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이 골목 저 골목 아무데서나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시껄렁한 무뢰배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내 연민과는 별개로 나는 언제나 있어야 할 그 장소, 정해진 그 시간에 나타날 뿐이다. 어쩌면 나는 필연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내고 싶어하는 모순 가득한 세상에서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는 신의 있는 동반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은선을 떠날 수 없고, 은선 역시 나를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은선은 여전히 나의 머리카락 한 올, 신발 끈 한 가닥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순환하는 길에서 뺨, 혹은 손은 사소한 거스러미에 지나지 않으며, 신경증이든 진지함이든 그저 부분적인 이유일 뿐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좋다. 어쨌거나 나는 여전히 은선의 옆에 있고, 지금은 그것만이 가장 중요하다.



친구와 절교한 후 은선은 자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으려 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다시 나와 마주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실의에 빠졌다. 군인 아저씨도 친구도 모두 나로 인해 잃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은선은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한층 자신감을 잃었다. 무언가를 해도, 하지 않아도 자신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무심한 하루하루의 기세에 눌렸다. 은선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무미건조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녀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상대는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게 나를 무시해도 내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은선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선은 결국 또 다시 나를 마주해야만 하였다. 역사 선생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교 소녀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사실, 내가 있건 없건, 나를 의식하건 않건 상관없는 일이다. 조심해서 되는 일도 아니며, 눌러서 막아지는 것도 아니다. 은선은 스스로의 사랑을 결코 풋사랑이라 여기지 않는 조숙한 열아홉 살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거의 잊은 듯 보였다.

은선은 역사 선생의 눈에 조금이라도 더 띄고 싶어서 학급의 회장이 되었다. 그녀는 식욕 왕성한 여고생들이 도시락 여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절절하게 역사 시간을 기다렸다. 싫어하던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것도 부모가 강요하는 이과를 선택하지 않은 것도, 모두 선생을 계속 보고 싶어서였다. 은선이 사랑하는 선생과 그 선생이 담당하는 과목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그녀는 조선시대의 과전법과 직전법의 차이를 줄줄이 암기했고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답험손실법의 구체적 규정을 모두 찾아 정리했다. 은선은 세밀하게 역사를 공부하면서 선생의 영혼 깊은 곳을 은밀히 알아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과제물을 걷어 가서 선생을 한 번 더 볼 때마다, 또 지시 사항을 들으며 가까이 서 있을 때마다 기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은선이 가장 기다리는 순간은 선생과 눈높이를 같이 하고 ‘차렷, 경례’라는 구령을 붙일 때였다. 앉아 있는 친구들 위로 선생과 자신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사를 나누는 짧은 시간에 은선은 온전히 선생과 하나가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였다. 은선은 그 날, 가슴이 너무 뛰어 선생의 얼굴을 보고 ‘차렷’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일어서기는 했으나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선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십대들의 터질 듯한 몸처럼 터무니없이 부풀어 올랐다. 일어서서 멍하니 있다가 친구들의 웃음이 터진 후에야 간신히 차렷이라는 말을 뱉었다. 울어버릴 것만 같아 ‘경례’라는 다음 말을 발음할 수 없었다. 은선의 마음을 알고 있는 친구들이 박장대소했다. 소녀의 마음을 모르는 선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차렷을 시도했다. 목소리가 소프라노 톤으로 높이 떠서 나왔다. 친구들이 더 크게 웃었다. 선생은 출석부를 반듯하게 세워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은선은 그 모습을 보고 또 다시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나치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느 순간 목에서 떨어져 나가 풍선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음성을 내기 위해 기를 썼다. 하지만 끝내 ‘경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선생은 은선을 대신해 구령을 붙였다. 친구들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은선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에게 멍청한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화가 났다. 여전히 자리에 앉지 않은 은선에게 선생은 ‘이제 그만’ 앉으라고 권했다. 교실이 또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어쩐지 은선은 앉을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다 바위가 되어버렸다는 전설 속 아둔한 여인처럼 다리가 굳어버렸다. 선생의 얼굴은 엄해져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앉아라. 친구들은 이제 웃지 않았다. 선생은 입술에 닿은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은선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 주변에서 웃음을 터뜨리던 친구들 중 누구도 선생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결코 돌이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의도도 허락하지 않은 채 내 길을 가고 있는 나를 예측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그악스럽게 그 자리를 점유한 채 숨을 죽였다. 은선은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저주하고 있었고 선생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자신의 몸을 경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야들야들한 여고생들의 살 냄새에 취한 나를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선생의 오해와 소녀의 격정이 충돌할 것을 예상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선의 가까이로 다가온 선생은 겨우 선생일 뿐인 자신의 인생을, 어쩌면 더 나은 꿈을 펼칠 수도 있었을 자신의 인생을 후회라도 하는 듯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앉을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은선은 자신이 왜 앉을 수 없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억울한 얼굴을 선생에게로 돌렸을 뿐이었다. 억울함을 건방짐으로 이해한 선생은 마지막이라는 듯 한 번 더 앉을 것을 명령했다. 가까스로 자제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이미 나를 외면할 수 없는 상태에 와 있었다. 똑같은 수업 내용, 야간 자율학습의 피곤, 박봉, 그리고 밀린 고지서와 같은 것들이 선생의 이마 주름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반듯하게 그의 옆에 섰다. 물론 은선을 동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처럼 내겐 아무런 힘도 없었다. 소녀의 눈물 어린, 설움 가득한 얼굴이 기어이 선생을 터뜨려 버리고야 말았다. 두텁게 더께 앉은 일상과 꿈의 켜들이 일제히 갈라지고 있었다.

은선은 머리라고 해야 할지 뺨이라고 해야 할지 정확하게 지칭할 수 없는 곳을 맞았다. 얼핏 보기에 심하게 꿀밤을 맞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분명히 나였다. 교묘하게 경계가 흩트려졌어도 때리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 모두 그것이 정확히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두 사람 사이에 제대로 자리를 잡는 순간, 둘의 입장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선생은 겁에 질렸고 제자는 당돌해졌다. 나는 물을 묻히지 않고도 물 위로 미끄러지는 소금쟁이처럼 가뿐하게 둘 사이를 오갔다. 초조해진 선생은 은선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자리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뜻밖의 모습으로 선생과 뒤엉키고 말았다. 절규에 가까운 은선의 비명이 뒤따랐는데, 선생의 볼에는 은선이 그간 경멸해 마지않았던 나의 자국이 생겨 있었다.

평생을 은선의 주위에서 어정거렸던 나로서도 결코 예측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나는 자진해서 나를 받아들인 은선 때문에 흥분하였으며, 자주 있지 않은 신선한 경험 때문에 잔뜩 들뜨고 말았다. 그 순간의 내 자취는 아름답진 않았지만 꽤나 정열적이었으며, 성숙하진 못 했지만 실로 감동적이었다. 곧 바로 후회하기 시작한 은선은 스스로를 저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은선이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 때문에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약간의 자괴감을 숨긴 채 호탕하게 기뻐하였다. 어쩐지 그 순간 이후로는 여태껏 한 번도 원해 본 적이 없는 것조차도 원할 수 있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좀 더 세상을 오래 산 선생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볼이 빨개진 그는 더 이상 억지로 은선을 앉히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은선과 나의 관계보다 자신과 나의 관계에 대해 더욱 민망해 하는 것 같았다. 선생은 그에게 남겨진 나의 흔적에 대해 은선을 나무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생은 자습이나 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허둥지둥 교실을 나갔다.

은선은 비통한 얼굴이었다. 변명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아무 말도 못 해서인지,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 같은 건 잠시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냉담해졌다. 어지간한 일에는 기죽지 않는 나였지만, 바로 전의 흡족한 마음 때문에 얼마간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은선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별개로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은선이 나를 밀어낼 처지는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기에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내 웃숨 소리가 그녀의 위벽을 자극했다. 은선은 배를 움켜쥐고 토할 것처럼 웩웩거리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여름 낮의 교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 흔한 매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가운데 어디선가 아주 작은 소리의 감탄사 하나가 흘러나왔을 뿐이다. 저런!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은선에게 사과한다.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한 상태 때문에 마치 먼 곳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환자분께서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셨는지 모르지만, 그만 화를 푸시죠.”

딱 이 만큼이었다면 은선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병원을 나섰을 것이다. 원래도 소심한데다 몸까지 아프니 만사가 귀찮아서라도 그대로 물러서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의 다음 말에 은선은 또 한 번 몽니를 부리게 되고 만다.

“우리 간호사가 여태 환자분하고 문제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말에는 간호사가 상식적이라는 뜻과 은선이 비상식적이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었고, 은선이 공연히 이상한 행동을 하여서 사실상 분란을 일으켰다는 비난이 암시되어 있었다. 은선은 버찌를 탐냈던 어린 시절부터 병원에 있는 지금까지 억울하게 나와 마주쳐야 했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린다. 이들은 늘 이런 식이다. 양보하는 척하면서 실은 경멸하고, 깍듯하게 대하지만 먼지만큼도 여기지 않는다. 은선은 온 몸의 힘을 쥐어짜내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도저히 이대로는 그만둘 수가 없다. 그럴 것이다. 내가 있는 한 은선은 가기로 예정되어 있는 곳까지 반드시 가야만 할 것이다. 결국 얼마간 추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곳까지 가보아야만 끝이 날 것이다. 그녀는 성대 깊이 막혀 있던 솜뭉치를 필사의 의지로 뽑아낸다.

“그래서 환자 아무에게나 반말을 지껄이나요?”

드디어 말이 터져 나온다.

“몸도 아파 죽겠는데, 내 돈 내고 치료 받으러 와서, 내가 왜 길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만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죠?”

드디어 항변을 시작한 은선은 그러나 열에 들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앞뒤가 맞게 말하고 있는지, 이유를 충분히 밝히고 있는지, 스스로 떠드는 말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와 각종 세균을 뿜어내고 있을 환자들의 구취, 몸 냄새가 은선에게 멀미를 일으킨다. 은선은 악을 쓴다.

“왜 아무한테나 반말을 쓰냐고? 왜 아무 짓도 안한 나를 괴롭히냐고!”

은선은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였던 간호사를 향해 보란 듯이 정확한 반말을 던진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그 간호사가 사람들에게 내내 뒷말을 잘라먹으며 불쾌하게 대했던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간호사는 은선이 진료를 위해 지루하게 기다린 시간, 열에 들뜬 머리, 미치도록 아픈 귀, 찢어질 듯한 목 등 모든 것에 책임이 있음에 틀림없다. 은선은 암기라도 하듯 그런 사실을 반복해서 머릿속에 나열한다. 간호사는 분명히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은선은 사실, 반말 같은 것이 중요한 빌미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간호사의 인격이라 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 한들 은선이 그것을 탓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은선도 눈치 채지 못하게, 다른 아무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는 내가 있었다.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나는 다른 어느 곳으로도 갈 수가 없었다. 은선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뭉크러진 버찌를 손에 들고 모퉁이까지 또 집까지 도망쳤던 그때처럼, 은선은 뒤돌아볼 수 없는 길을 달렸던 것이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낸다. 이 여자가 환자를 함부로 대했다구요! 하지만 다른 환자들은 자신들은 그런 취급을 받지 않았다는 듯 멀뚱히 앉아 있을 뿐이다. 마치 간호사가 은선에게만 반말을 했으며, 아마도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듯 조용하다. 환자들도 얄밉고, 의사, 간호사들도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선은 병원에 있는 모두를 욕하고 싶다. 아프고 나약한 사람들은 절대 서로 뭉치지 않는다. 항상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벌어지는 상황에 몸을 내맡길 뿐이다. 그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은선은 나라도 끌어들여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말이 안 된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은선은 고집스러운 말의 성, 그래서 더 초라해져 가는 의미의 성을 쌓는다. 의사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선을 만류한다.

“환자분, 진정하시죠. 김 간호사, 사과드려.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

간호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게 아니라…….”

“뭐가 그게 아니라는 거지? 어서 사과부터 하라고. 사과해.”

은선은 머리가 아파 견딜 수가 없다. 이대로 더 뜨거워지다가는 성냥개비처럼 순식간에 머리에 불이 붙어버릴 것만 같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

간호사가 울먹인다. 은선은 끝까지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간호사를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몸을 웅크린 채 은선과 다른 사람들의 다툼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던 나를 말이다. 나는 은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도 정상이 아닌 몸 상태를 핑계 삼아 내가 활약하는 것을 보게 되어 얼마쯤 기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은선을 향해 어색하게 웃는다. 그녀는 자신이 옳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은선은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하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커다란 쇠망치에 머리가 짓이겨지고 있기라도 한 듯 두통이 극에 달한다. 혈관이며 세포가 죄다 터져 나가버릴 것만 같다. 떨리던 다리, 지끈거리던 머리, 힘 하나 없던 근육들이 일시에 같은 지점에서 만나 딱 멈추어서는 순간, 은선은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 것 같은데, 은선은 그 와중에도 자신이 내지른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잠시 하며 그대로 기절하고 만다. 내가 있던 자리의 끝이 대개 그렇듯, 순간 조용해지면서 무의미해지고 만다.



은선은 그야말로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몇 달을 더 선생의 얼굴을 봐야하는 일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입 안 가득 넘어온 토사물을 뱉어내지 못하고 도로 삼켜야만 하는 상황처럼 곤욕스러웠다. 은선은 버텨내기 위해 기억을 뭉개버렸다. 반짝거리는 배지를 달고 있던 키 큰 헌병도,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그리고 아마도 자신을 꽤 좋아했던 친구도, 역사 선생님도 모두 잊으려고 애를 썼다. 무엇보다 추억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낼 내가 두려웠기에, 사력을 다해 기억을 지웠다. 쉽지 않았지만 나를 못 본 체해야만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여러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친구를 견뎌야 했을 때도, 직상 상사 간의 싸움 때문에 엉뚱하게 피해를 입었을 때도, 애초부터 흐릿한 윤리를 마지못해 따라가야만 했을 때도 은선은 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결코 내게서 급습을 받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주위를 살폈고, 우직하게 노력했다. 아마 이렇게 몸이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열에 들떠 있지만 않았더라도, 은선은 한동안 더 나를 멀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나를 제대로 보지 않는 상태로 오롯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아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깨어났을 때, 은선은 병원의 간이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동시에 자신이 의사와 간호사를 향해 소리를 지르다 쓰러진 기억이 떠오르면서 겸연쩍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벌써 해가 진 것인지, 창밖이 캄캄하다. 혼자 낯선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에 무서움이 몰려온다. 당장 나가고 싶지만 팔에 꽂힌 바늘을 빼낼 수가 없다. 은선은 작은 소리로 사람을 불러 본다.

“저기요.”

딱히 누구를 지칭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부르는 게 분명한 소리를 내며 은선은 신기하게 몸이 좋아진 것을 느낀다. 우선 침 삼키기도 어렵던 목이 가라앉았음을 알 수 있다. 열도 내린 것 같다. 더 이상 몸이 떨리지 않고, 두통도 사라졌다. 수액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은선은 팔과 연결된 투명한 비닐 주머니를 보며, 나를 떠올린다. 어떻게 나와 함께 그런 진창을 뒹굴 수 있었는지, 무안하기 짝이 없다.

쪼그라든 수액 주머니와 팔에 꽂혀 있는 바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해 보려고 애를 쓰는데, 김간호사라 불리던 그 간호사가 들어온다.

“좀 어때요?”

더 이상 반말이 아닌 존댓말이다. 은선은 대답할 말이 없어 입술만 달싹이다 몸을 일으킨다. 몸이 나아진데다 푹 자고 일어났기 때문인지, 잠시 낙관적인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를 외면하려고만 했던 원래의 은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두른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오래전부터 내가 함께 있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녀와 함께 있을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 그녀가 가엽다. 나는 아득한 영원에 닿아있는 나의 길을 목도리처럼 그녀에게 둘러 준다. 은선이 나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나는 끝까지 그녀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간호사가 바늘과 수액 주머니를 정리한다. 은선은 자신과 간호사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이 모든 것이 악의를 품고서 무례하게 자신을 몰아붙인 나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은선은 결코 끝없이 반복되고 재생되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살짝 약이 오른다.

“네 시간쯤 주무셨어요.”

간호사는 부드럽게 말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부루퉁하다. 은선은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가뿐하다.

“저, 아까…….”

은선은 나에 관해 말을 꺼내려다 멈추고 만다. 그렇게 격렬했던 감정에 대해 죄송하다든가 실수라고 한다면, 모든 게 지나치게 가벼워지고 말 것 같아서다. 은선은 자신이 경솔해서 내게 의지한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싶다. 결코 성격이 나쁘거나 거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다. 하지만 변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쉽게 포기한다.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간호사의 왼쪽 뺨이 가시처럼 눈에 와 박힌다. 은선은 자신의 힘이 그렇게 세었던가 싶어 다시 자괴감에 빠진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간호사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받는다.

“알아요. 환자분 중이염 상태가 심해서 그렇대요. 항생제랑 투여했고, 약도 제가 대신 받아뒀으니 드시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네?”

은선은 간호사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한다.

“제가 반말을 쓴 게 아니라, 손님 귀 상태랑 몸 상태가 좀 안 좋으셨던 거예요. 물론 제가 사랑니 때문에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탓도 있어요.”

간호사는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치통의 반증이기라도 하다는 듯 은선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간호사의 왼쪽 볼은 맞아서 부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불거져 있다. 은선은 주변을 맴돌던 나를 와락 움켜잡는다. 그녀의 작고 축축한 손이 내 목을 세게 옭죈다. 나는 나를 못 보고 있는 것 같았던 그녀가 정확하게 나를 잡았다는 사실이 과히 유쾌하지만은 않다. 종종 그랬듯 나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호소하려 한다. 하지만 은선은 손에 힘을 더해 내가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일곱 살 꼬마 때부터 이미 내 길에 들어와 있었던 그녀를 쫓아다니느라 나 역시 힘들었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녀의 힘이 어찌나 센지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나는 헌병을 때렸던 상사와 은선의 친구, 선생님, 그리고 다른 많은 일들에 대해서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주 많다. 은선이 원한다면 죄다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일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 어떤 것도 무화시켜버리는 우연의 길 위에서, 변명과 치졸함이 난무하는 필연의 길 위에서 나 역시 새로이 진화하는 나를 보았을 뿐이라고. 내가 나를 낳았고, 그 내가 또 다른 나를 낳았으며, 영원히 낳고 낳았을 뿐이라고.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비슷하고, 비슷하지만 또 조금씩 다른 그 안개 낀 길에 대해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은선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백과사전처럼 몽롱한 나에 대해, 자기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가장 시시한 제스처도 마다하지 않는 나에 대해, 그리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다가 종종 우스워지기도 하는 나에 대해 아직도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은선은 쩔쩔매며 옷을 찾아 입고, 간호사에게 고개를 까딱한다. 사랑니로 부은 간호사의 뺨을 다시 보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병원을 나선다. 은선은 이제 다시 나를 멀리 쫓아버린다. 나를 조금쯤 알게 되었을 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고집을 부린다. 나는 세게 눌린 목을 주무르며 기를 쓰고 그녀를 쫓아간다. 은선은 평소처럼 발걸음을 재게 놀려 나로부터 도망간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에 유의미한 간격이 생긴다. 나는 은선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내 이야기를 한다. 아주 조금 가벼울 수 있는, 하지만 결코 우습지는 않은 나, 따귀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끝. <원고지112매>



















2015년 7월 15일 수요일

Wanted a good Translator

The 3 ways are translated by a good translator.

[Given~~] is translated by myself.

I really need a good translator.

Novel Ahjin

Finally I decided to come out.

The way I talk to (and maybe hear from) the world is writing including minifictions, short stories, novels and so on.

I am not sure how long I can reveal myself.

But this is a start.




사이렌

사이렌
심아진
 
보도와 차도의 경계에서, 남자는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채 걸음을 멈추었다. 파랑, 빨강으로 점멸하는 경고등을 통해 금세기를 뒤흔든 미해결 사건의 전말이라도 캐겠다는 듯, 남자의 시선은 열렬했다. 하지만 곧 무심하나 끈질긴 도시의 소음과 풍경이, 공간을 장악했던 경찰차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보행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며 천천히 우회전을 하던 내 눈에 남자가 들어왔다. 횡단보도를 건널 참이었던 그는 안간힘을 다해 후줄근함을 떨쳐내고 있는 청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닦을 날을 미루기만 했을 허름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경찰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아직도 소심하게 고개를 돌린 채 서 있는 남자는 돌아갈 길을 잃은 애완견처럼 불안해보였다. 나는 쥘 이유도 펼 이유도 없어 보이는 그의 손가락들이 나른하게 흔들리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날 밤, 나는 남편과 잠을 자다가 누군가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다. 이 봐, 물 좀 줘. 남편과 비슷하게 생긴 그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만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거침없이 내게 요구했다. 나는 곧 그가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남편의 아버지, 곧 내 시아버지란 것을 알아보았다. 자기 전에 켜 둔 수면등이 비교적 선명하게 그의 모습을 비춰내고 있었다. 정수기에서 물 한잔을 받아 시아버지에게 건네주자 그는 급하게 물을 들이켜고 말했다. 생활이 나를 살렸다. 먹고 살기 빠듯했으니까,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어도 괜찮았단 말이다. 나는 남편이 자주 ‘생활’을 언급하곤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아버지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애정 따위를 다급하게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물방울이 묻은 입언저리를 닦아내고는 남편의 옆에 반듯이 누웠다. 잠이 깨서 다시 잠들기 어려워진 나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 시아버지는 금방 코를 골았다.
고단하기 짝이 없는 하루였다는 것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낮에 보았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억지로 안도하며 꺼내곤 하였을 옷과 신발이 생각난 것뿐인지도 몰랐다. 그것들은 모두 절망적인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일순 순결해진 거리가 떠올랐다. 울퉁불퉁한 감정들을 다양하게 소통시키던 사람들은 경찰차가 대로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순간, 지극히 단순해졌었다. 하나의 거대한 소리가 자존심을 버리는데 익숙한 사람들의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한꺼번에 삼켜 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 정적을 참을 수 없다고 느끼며 괴로워하다가 까무룩, 다시 잠이 들었다.
또 한 번 누군가가 나를 깨운 것은, 하염없이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하는 꿈을 꾸고 있는 와중이었다. 소의 연골처럼 생긴 것을 무릎에 덕지덕지 바른 늙은 여자가 내 얼굴에 코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묻어 있던 뽀얀 것이 내 잠옷의 어깨 부분에도 조금 묻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여자는 아픈 무릎이 자랑스럽지 않을 이유는 없다는 듯 득의에 찬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배우지 않았기에 살 수 있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았다면 애들을 키워내지 못했을 거다. 그녀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척하기 위해 원래 자신의 표정을 잃어버린 내 시어머니였다. 남편은 늘 어머니의 무릎을 안쓰러워했었다. 나는 남편의 옆에 잠들어 있는 시아버지를 곁눈질하며 아까처럼 물이라도 떠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내 생각을 알았는지 차갑게 말했다. 냉수라면 마실 만큼 마셨다. 내 아들이 너와 결혼할 때부터 말이다. 시어머니는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잠든 당신 아들의 얼굴을 쓸었는데, 그는 감은 눈을 씰룩였을 뿐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시어머니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 사이에 누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잘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 자리에 도로 누웠다. 침대가 너무 비좁았다. 그러니까 두 명이 자면 딱 맞는 침대에서 네 명의 어른들이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남편의 살이 내게 아주 많이 닿았는데, 그의 피부는 땀이 배어 나와 끈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극도로 예민해져서 누군가가 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시아버지보다 더 늙었지만 시아버지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아버지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뭐가 필요하세요? 나는 일어나 앉으며, 그가 나를 두드리거나 흔들지 않아도 내가 이미 깨어 있다는 것을 알렸다. 우리 시절엔 말이다. 그는 ‘우리’의 ‘우’자를 약간 세게 발음했는데, ‘우리’를 강조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말하는데 더 익숙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약간 다소곳해 보일 수 있겠다 싶은 자세로 섰다. 그러니까 어떤 명령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는 사람처럼 두 손을 앞으로 살짝 모으고 섰던 것이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아버지일 것이라 짐작되는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부탁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기도 낚았고, 장기도 두었고, 장례도 치렀고, 닭도 잡았다. 물론 가끔은 아편 같은 걸 하다가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투전판에서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늘 우리였다. 나는 그가 강조하는, 그리고 평소 남편이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하는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팔짱을 꼈다. 아마 다소 건방져 보이는 동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공감하든 공감하지 못하든 상관없다는 듯 나의 자리, 곧 남편의 오른쪽을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우리였던 당신의 시절엔 늘 그렇게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듯이. 졸지에 자리를 빼앗긴 나는 일렬로 늘어선 발을 바라보며 침대 아래쪽에 서 있었다. 하얗거나 붉거나 시커먼 발바닥들은 각자의 개성에 맞추기라도 한 듯 다양한 모양의 굳은살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하릴없이 내 두 발을 비벼댔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내 착각을 짚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시아버지의 아버지는 잠들기 전에 잠꼬대처럼 한 마디를 더 했다. 나는 네 시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니라 시아버지의 큰아버지다.
나는 잠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침대에 누운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잠자는 연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아슬아슬한 표정이었는데, 정말 잠이 든 것인지 잠자는 척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남편의 오른손을 잡고 있는 시아버지의 큰아버지의 왼손, 남편의 왼손을 잡고 있는 시어머니의 오른손, 그리고 시어머니의 왼손을 잡고 있는 시아버지의 오른손을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앞사람을 놓치지 말라는 잔소리를 수도 없이 들은 유치원생들처럼 서로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침대 양 옆에 늘어진 시아버지의 큰아버지의 오른손과 시아버지의 왼손 중 하나를 내가 잡아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 모두 사진으로 본 기억이 있었다. 제 남편의 선생님들이시죠? 그들은 기특한 제자를 바라볼 때 짓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내가 그들의 제자는 아니지만 제자의 아내라면 제자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중 머리가 벗겨진 선생이 피곤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비비며 입을 열었다. 난 다 알려줄 수는 없었다. 나 역시 내가 배운 한도 내에서 가르칠만한 것을 가르쳤을 뿐이다. 어쩐 일인지 나는 좀 화가 나서 따지듯 물어보았다. 어떤 기준에서 가르칠만한 게 있고, 가르칠만하지 않은 게 있다는 겁니까? 다른 선생이 대머리 선생을 대신해 비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역시 왜곡된 것을 왜곡된 것인지 모르고 배웠을 뿐이야. 우리는 그저 배운 대로 가르쳤을 뿐이라니까. 또 우리군요. 그들은 내가 왜 ‘우리’에 민감해하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애원조로 말했다. 너무 피곤하구나. 자리를 좀 만들어주면 안되겠니? 나는 침대 왼쪽에 있는 붙박이장에서 이불과 베개를 꺼냈다. 두 선생은 침대 발치에 요를 펴고 나란히 누워 마주한 쪽의 손을 서로 잡았다. 침대에 가까이 있는 선생이 남편의 발에 손을 얹는 것을 보면서 나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들은 남편의 발이라도 잡고 있다면 굳이 침대에 눕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스승들이 자신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면 남편은 당장 술상이라도 봐야한다며 부산을 떨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깊은 수면 상태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잠을 자는 그들은 실로 다양한 소리를 냈다. 어금니를 갈거나 앞니를 딱딱거렸고, 한숨을 쉬거나 코를 골았으며 또 가끔 쩝쩝,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침대 시트와 이불들이 처량하고 고단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여겨지는 그 소리들을 비범하게 찢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듯하였다. 하지만 내 예상은 새벽 두 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와 동시에 깨지고 말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남편과 나의 방에 들이닥쳤던 것이다.
이제 그 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편과 나의 침실로 찾아왔는지 얘기하는 것은 지루한 일이 될 것이다. 남편의 힘센 고모와 간이 좋지 않았던 외삼촌, 또 함께 다락방을 들락거렸던 사촌 형을 비롯해 담배를 나눠 피웠던 친구, 남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의 첫 여자, 그리고 알리바이를 공유했던 직장 상사들까지,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쉬지 않고 불어났다. 그들은 여럿이 소란스럽게 들어오기도 했고 슬그머니 혼자 들어오기도 했으며, 스스럼없이 내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곧 냉장고는 텅 비었고, 내어줄 이불과 베개도 동이 났다. 방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병렬 혹은 직렬로 연결된 꼬마전구들처럼 가로로 혹은 세로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정글의 넝쿨들처럼 지그재그로 얽혔다. 누군가는 원숭이마냥 가구 위에 올라갔고, 누군가는 인간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온 방을 빼꼭히 메운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 남편의 머리카락 한 올, 옷깃 하나라도 부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남편은 사람들의 아래에 깔려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제 쪼그려 앉을 수도 없게 된 나는 구석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뒤척이거나 코를 골거나 잠꼬대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리와 피로, 소리와 잠……. 불현듯 그 몽롱한 소리의 장막들을 찢으며 생경한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지극히 무례하게, 겹겹의 세상을 재빨리 열고 또 서둘러 닫아버렸던 폭력적인 그 소리.
 
우회전 깜빡이를 넣으며 핸들을 꺾고 있던 나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남자이기도 했고,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남자이기도 했다. 경찰차가 삐용거리며 사거리를 크게 돌았던 그 짧은 순간, 나는 남자가 자신의 방어적인 일상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일부러 호기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찰차의 소리에 몰입한 그의 모습은 길고 복잡한 역사를 고의적으로 단순해 보이게 만들려는 듯 작위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짧은 시간을 그러쥔 채 자신에게 엉켜든 것들로부터 간절히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한 인간을 보았다. 그것은 썩 유쾌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사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후줄근해져버린 청회색 양복이나 영영 닦지 못할 구두만큼 남루한 장면이었다.
엑셀을 밟아 속도를 내면서 나는 내가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흘린 게 눈물 따위는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내 남편이었고 또 수많은 다른 이들의 남편이었으며, 그리고 너무나 명백하게도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목을 길게 뺐다가 매우 아쉽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남자가 백미러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았다. 세상을 여는 뻔뻔한 사이렌 속에 무언가 소중한 것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듯 남자의 표정은 진지했다. 쥘 이유도 펼 이유도 없어 보이는 그의 손가락들이 자조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나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

나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
심아진
 
조심해야 합니다. 발이 땅에 닿으면서 생기는 진동이 아기 지빠귀들을 깨우지 않도록. 귀 끝에서 떨어져 나간 무분별한 털 하나가 멀리 있는 어미 지빠귀의 코를 간질이지 않도록. 조용히 빠르게, 오솔길을 가로지릅니다. 언 땅을 뚫고 나오느라 녹지근하게 몸이 풀어진 풀들은 내 무게를 불만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심을 보이네요. 거기 좀 더 세게 밟아 봐. 그들 중 하나가 내게 특별한 주문을 하더니, 친근한 척 인사를 건넵니다. 봄이 왔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해야만 하는 나는, 아주 금방 여럿 중에 하나가 되어버릴 그 풀에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 새둥우리가 있는 나무까지 가야 하므로,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신중한 내 발걸음은 목표한 나무를 향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제 속도를 냅니다. 더 빠르게. 더 민첩하게!
아기 새들은 다급한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겨우내 완전히 소진해버린 단백질을 정신없이 보충합니다.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였을 텐데, 미처 세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보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입가에 묻은 붉은 피와 보드라운 깃털 몇 개를 닦아내며 만족스럽게 돌아섭니다. 하지만 돌아서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벌써 불안합니다. 누가 나를 본 것은 아니겠지요? 아무도,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어야 합니다. 세상 온갖 일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버리는 너도밤나무의 가지와 잎들은 증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저 아래 꽃들은 자신들에게만 관심이 있을 테니 보아도 보지 않은 것과 다름 없을 것이고, 바람은 어차피 흘러서 흩어지는 노래만을 부를 테니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누군가가?
나는 나를 볼 수도 있는 수백 개의 눈들을 미리 두려워합니다. 당신들은 자주 내 꼬리털이 지나치게 기름지거나 야무져 보이지 않아 순수하다고 말하고, 까만 내 눈이 잔인하거나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합니다. 당신들은 내 근면함을 본받고 싶어하고, 열심히 나무껍질을 갉는 모습을 보고 동정을 금치 못하기도 합니다. 인간들에게 나는 당근 조각이나 잣 등 피가 흐르지 않는 건전한 것만을 먹고 다니는 꿈같은 동물입니다. 당신들은 어찌나 나를 곱게 여기는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권고하기도 합니다.
새끼를 발견하는 경우, 따뜻한 물병과 버찌씨 쿠션으로 따뜻하게 해 주고, 꿀을 넣은 우유와 종합 영양 시럽을 먹일 것이며, 소화를 돕는 배 마사지를 해 주시오.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 앞에서 씨앗이나 열매, 버섯 등을 단정하게 안고서 기꺼이 사진에 찍혀주기도 합니다. 하!
 
이제 당신들은 내가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알고 있는 그것이 나라고 확신하지 마세요. 내 이름이 날다람쥐든 청설모든, 프레리도그든 슈거 글라이더든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내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결코 당신들이 디즈니 만화영화 따위에서 그리는 작고 예쁜 인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실 다정하지도 깜찍하지도 않으며, 맑은 이슬에 목을 축이지도 않고 초저녁 달빛에 몸을 씻지도 않습니다. 나는 생물학적인 계통을 밟았을 때 어김없이 ‘쥐’에 속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깃털도 마르지 않은 새끼 새나 이제 곧 부화를 시작하려는 알, 심지어 작은 도마뱀이나 개구리까지 아주 맛있게 먹어치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설치류에 속하는 나는 당연히 육식도 합니다. 도토리나 호두만을 굴리는 게 아니라 떨어진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고기도 뜯고 피도 마십니다.
때로 나는 콧수염에 검초록의 진흙이나 다른 동물의 분비물 따위를 묻힌 채 음습한 골목을 누비고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며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때로 나는 생선뼈가 비린내를 풍기는, 대수롭잖게 잊힌 사체가 굴러다니는 시궁창에서의 끈적끈적한 밤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당신들이 귀엽다고들 하는 표정으로 내가 무언가를 갉고 있는 것은 사실 끝없이 자라나는 아래 위 한 쌍의 앞니가 턱이나 두개골을 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6천만년을 이어온 유전자의 확고부동한 명령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내게는 천형인 그 행위를 놓고 당신들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곤 합니다. 오해를 이해로 바꾸려는 노력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또한 선택하지 않았어도 내게 있습니다. 그래,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일정한 생활패턴을 유지하고 정해진 사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앞에 아몬드나 해바라기 씨 등을 들이밀며, 쭈쭈 거리는 당신들의 편견에 찬물을 끼얹을 용기가 없습니다. 푸른 안개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나, 허공에 뻗은 나뭇가지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나, 슬프고 조용하게 귀를 쫑긋거리는 나를 아주 잘 안다고 자신하는 당신들을 조롱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의 평판이 내 근육에 붙어 있는 피부처럼, 이제 내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곤합니다. 하지만 사랑스럽게 나를 보는 당신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나는 다시 앞니를 번쩍이며 커다란 알밤 한 알을 들어 보입니다. 미친 듯이 쳇바퀴를 돌면서 자학하지 않는 척, 즐거운 척 연기를 하기도 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그 박수가 진심이라 나는 더욱 지칩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진 나는 엉덩이와 꼬리를 살짝 흔들어 준 후 쏜살같이 숲속으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수줍은 내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닙니다. 나는 먹을거리를 잔뜩 모아둔 안전한 내 동굴로 돌아옵니다. 동굴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안심하고 늙어버립니다. 그리고 다 먹지도 못할 비축된 양식들을 보며 비겁하게 혼자 뇌까립니다.
나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 나도 나를 알지 못한답니다.

회귀

회귀
심아진

남자의 어머니는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다는 듯 차분하게 비닐봉지를 뒤집는다. 그런 절도 있는 동작과는 대조적으로, 빨갛게 윤나는 사과들은 처량한 소음을 만들며 떨어져 내린다. 쉽게 멍들고 깊숙이 깨지는 소리가 거리를 울린다. 여자는 비탈길을 따라 굴러 내려가는 사과들을 무력하게 바라본다. 열 개만 사려던 것을 스무 개나 산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자신처럼 남자의 어머니도 사과를 좋아할 것이라며 욕심을 냈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다만 사과가 너무 많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뿐인지 모른다. 여자는 그렇게 믿고 싶다.
사과들은 여자의 아쉬운 눈초리에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이 바쁘다는 듯 몇 갈래의 길로 흩어지고 만다.
“어머니…….”
제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환대를 여자에게도 줄 것으로 기대했던 남자는 황망히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본다. 짧은 속눈썹 아래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 여태 무언가를 ‘오해’했던 자가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무력함이 어린다. 그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전화번호를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진지하고 허망하다. 남자의 어머니는 당신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흔한 대사를 읊조린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여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건성으로 들으며 굴러 내려간 사과들의 자취를 뒤쫓는다. 어떤 것은 첫 번째 골목으로 어떤 것은 두 번째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갔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골목이 아닌 큰 길을 따라 우르르 내려가던 사과들이 어디쯤 정착해 있을 지 궁금하지만, 도로가 굽어지면서 사과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남자의 집은 무심하게 높고 과도하게 경사진 곳에 자리해 있다. 스무 개의 사과 중 어느 것 하나도 여자의 발치 아래에 남지 않았다. 남자의 어머니가 좋아한다던 사과들은 남자의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는 여자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여자는 결코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삼 년이 흐른다. 남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삼십 년을 함께 산 어머니와의 정이 더 커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력함을 비웃기 위함인지, 혹은 그저 인생에서 사랑 따위가 시시해져 버려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남자는 여자를 떠난다. 여자는 원망하지 않는다. 조금 거칠어지고, 미약하게나마 강해졌을 뿐이다. 남자는 어머니의 집에서 가능한 먼 곳에 신혼집을 마련한다.
 
다시 삼 년이 흐른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사과를 먹지 않는다. 여자가 사과를 먹지 않아서 여자의 가족들도 사과를 먹지 못한다. 여자는 오로지 꿈에서만 사과를 본다. 갈색의 멍을 숨긴 도도한 사과가 꿈에서 깨어난 여자의 시간을 잠식하기도 한다. 여자는 가끔 사과가 만들어주는 멍을 가슴에 새긴다. 또 가끔은 사과가 줄 수 있을 아삭한 감촉에 군침을 흘리기도 한다. 사과를 먹지 않는 여자는, 다른 사람의 삶과 똑같은 무난한 삶이 자신에게도 전개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진다.
 
십 년이 더 흐른 어느 날, 남자는 대학 병원 부설의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를 보낸다. 그는 영정 앞에서 여자가 떠오르는 자신을, 패륜아라 생각지는 않는다. 남자는 불현듯 여자와 어머니가 대면한 날 이리저리 흩어졌던 사과의 행방을 궁금해 한다. 비탈길의 굴곡을 따라 물처럼 흘러내렸던 사과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남자는 좀 더 빨리 사과를 찾아 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늑골 아래가 쪼개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프다. 오래전에 새겨진 통증. 국화 옆의 향냄새가, 묘연했던 추억의 퇴로를 열어준다. 남자는 무방비로 옛 기억에 잠식당한다. 그는 희끗거리기 시작한 머리에 삼베 모자를 눌러 써보지만 전처럼 감정을 숨기는 일에 능숙하지 않다.
남자는 십 육년 전 사과를 샀던 곳을 찾아,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어머니의 동네를 방문한다. 그러나 주황색 천막 아래 과일들이 풍성했던 예전의 그 가게는 없다. 대신 총각들이 모여 싱싱한 채소를 판다는 식료품점과 유기농 제품 매장, 작은 규모의 슈퍼 등에서 과일을 팔고 있을 뿐이다. 남자는 이 가게, 저 가게를 모두 거쳐 조금씩 사과를 산다. 스무 개쯤 될 것이다.
멀리서 보는 남자의 어머니 집은 예전처럼 위풍당당하지 못하다. 조만간 불합리한 값에 처분될 것을 예상하고 있다는 듯 낙담한 모습이다. 그래도 길은 여전히 가파르고 도도하다. 남자는 십 육년 전의 사과가 행여 눈에 띄지 않을까 하여 주변을 세밀히 관찰한다. 한 알의 사과는 한동안 남자의 집 매끈한 유리창을 두드렸을지 모른다. 한 알의 사과는 혹, 직장에서 유난히 승진이 빨랐던 그의 사무실 책꽂이 속에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 남자가 결혼한 여자와 살을 섞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을 때 그 옆을 굴러갔을 수도 있다. 사과는 또, 남자가 유유한 별 하나를 발견했을 때 남자의 구두 옆에서 지친 걸음을 멈추었을 수도 있다. 사과는 빈번히 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하며 하릴없이 남자의 주변을 맴돌았을지 모르겠다. 남자는 창백한 골목 사이에서 길을 잃었을 사과를 떠올리며 힘겹게 길을 오른다.
남자는 여자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서 있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사과를 떨어뜨린다. 탱글탱글하던 과일들이 순식간에 생채기를 내며 길을 따라 굴러간다. 잠시 하나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던 사과들은 이내 천 개의 길로 흩어진다. 그것들은 비루한 일상으로부터 도망이라도 가듯 하나같이 급하다. 황망히, 수줍어하며, 길 아래로 내달리는 사과들이 있다. 작은 골목길을 따라 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사과들도 있다. 골목은 심심치 않게 많고 길은 심오하게 굽어 있다. 남자의 선량함과 무거움, 소심함과 가벼움이 길을 따라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남자는 잠시 화를 낸다. 하지만 자신의 주위에 남아 있지 않은 사과를 오래 원망할 수는 없다. 남자는 낮고 침울하게 여자의 이름을 불러본다.
여자는 인기 없는 영화를 혼자 보고 있다. 위염을 자주 앓는 배를 위해 하루 한 잔으로 제한한 커피를 소중히 마신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여자는 베란다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나뭇잎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다급하게 뛰어나가다가, 꼬리가 잘린 고양이가 화단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 여자는 손톱을 손질하고 화장을 곱게 한 날 서럽게 운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매일, 길을 따라 사라진 사과들을 생각한다. 굴러 내려가는 그 속도를 상상하고, 알 수 없는 길의 모호함을 떠 올리고, 막다른 곳의 냉담함에 부대낀다. 여자는 사과들이 흩어져 있는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해 평생, 애를 쓴다. 그것이 여자가 사과를 먹지 않는 이유다.
여자의 친구들은 사과를 먹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자식들은 그런 여자를 부끄럽게 여겼다. 남편은 여자가 사과를 먹지 않으므로, 자주 화를 냈다. 여자는 그 모든 것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그녀의 회한 만큼 무거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위악을 떨든, 합리화로 몸을 숨기든, 체념으로 밥을 먹지 못하든, 여자에게 사과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무엇이었다.
 
남자가 사과를 모으기 위해 사과를 다시 흩어버린 그 날로부터 십 년이 더 지난다. 여자는 알지 못하는 시간이나, 남자에게는 지나치게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사실 여자가 알지 못한다는 가정은 여자의 무의식 너머에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자는 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던 사과가 결국 어디서 다시 모이는지 예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그래서는 안 되는 것들로 둘러싸인 일상이 대수롭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여자는 남자와 그의 어머니가 살던 집에 가보기로 한다. 길 아래에서부터 보였던 남자의 집은 주변 건물이 높아진 탓인지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큰 길 대신 작은 골목길을 통해 남자의 집까지 올라가기로 한다. 사과를 비롯해 과일들을 파는 가게가 나란히 두 집 있다. 사과처럼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모자를 쓴 마네킹이 서있는 의상실을 지난다. 여자는 모퉁이를 돌아 큰 길이 나오자 다시 반대편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담장 위에 줄줄이 능금 화분들을 올려놓은 몇 채의 집들을 지난다. 단단한 작은 알맹이들이 규모 있게 반짝인다. 다시 큰 길과 연결되어 있는 골목 어귀에 이르자, 사과를 테마로 한 놀이터가 보인다. 여자가 걷는 길 가득 사과향이 아삭하게 퍼져 있다. 여자는 이십 육 년 전, 스물여섯 살 젊은이로 걸어갔을 때보다 더 가슴이 뛴다. 이제 겨우 작은 골목 두 개를 거쳐 왔을 뿐인데 벌써 그녀는, 걸어갈 모든 길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소연하지 않아도, 울거나 절규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런 나이가 있다. 여자는 이 거리 곳곳에 천 개의 길로 갈라져 내려갔던 사과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있음을 알아차린다. 여자는 사과 꽃처럼 하얗게 웃는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의 어머니가 서 있었던 그 자리에 단아한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파란 빛을 연하게 숨긴 빨간 사과들이 당돌하게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는 그 부끄러움 없는 시선 때문에 늙고 거친 피부를 발그레 물들인다. 길을 오래 돌아왔어도 남자와 여자는 너무 늦지 않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여자는 작은 사과 하나를 따 베어 문다. 영겁을 회귀하여 마침내 여자에게 온 사과는 그리운 맛이 났다.
<끝>
 
 

이유 있는 길

이유 있는 길
심아진
마침내 경수는 소라 탑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친 경찰차들 앞에서 오토바이를 멈출 수 있었다. 경찰들을 보고 이렇게 안도감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최소한 무방비로 혼자 깔려 죽지는 않겠지 싶어 앞뒤 없이 브레이크를 잡아버렸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인지 시위 진압용으로 쓰는 살수차나 벽차 대신 여러 대의 경찰차가 청계광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실수로 자살하는 이의 비명처럼 절박한 바퀴소리를 냈고, 경수는 왼쪽으로 가볍게 튕겨나갔다. 난반사하는 경광등의 불빛과 사이렌, 경찰들의 확성기 소음이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았다. 경수의 오토바이 뒤로 바짝 따라왔던 그것은 이제 거대한 회오리사탕처럼 둘둘 말린 채 정지해 있었다. 다행히, 정지한 것이었다.
경찰들은 인재라고도 자연 재해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이상한 사건 앞에 잔뜩 진장한 모습이었다. 그 중 두 명이 총을 겨누며 경수에게 다가와 수갑을 채웠다.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 경수와 거대한 덩어리를 찍느라 야단이었다. 경수는 수갑을 찰 이유가 없다는 항변도 하지 못한 채, 긴 구간 자신과 함께 달려온 ‘길 덩어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파헤쳐진 청계천변의 길이 두꺼운 카펫 말린 모양으로 쓰러진 오토바이 뒤에 바투 붙어 있었다.
 
경수의 사건은 곧 휴대폰과 인터넷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남대문경찰서와 종로경찰서, 혜화경찰서 담당자들의 합동 수사가 진행되었다. 사건이 시작된 지점은 정확히 경수가 청계천로에 진입한 고산자교 부근이다. 일요일 오후 아홉 시경 경수의 오토바이가 달려가는 길을 따라, 청계천변의 차량 통행로가 깨지면서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경수는 오토바이가 왕십리 부근을 지날 즈음에야 자신의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알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어요. 제 오토바이 마후라 소리가 장난 아니거든요.”
경수는 불 꺼진 상가 쪽 인도에서 아이들인지 어른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몇몇 사람이 롤러 블레이드 타는 모습을 보았다. 보드나 블레이드를 타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도로로 튀어나오는 수가 종종 있었기에, 속도를 늦추었다. 그런데 속도를 늦추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본 순간, 그는 거대한 맷돌 덩어리 같은 것이 자신의 오토바이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경수는 그 돌덩어리가 자신을 덮치려 한다고 생각했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어쩌고 할 경황이 없었다. 경수는 그대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 묵직한 것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으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덩어리의 속도가 자신의 속도에 비례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동대문을 거의 다 지나갈 때쯤이었다. 경수는 오토바이를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는 바로 그 순간 점점 거대해진 그것이 자신을 납작하게 깔아뭉갤 것만 같아서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 시간에 나 말고는 다른 차나 오토바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예요.”
경수는 아직도 온 몸이 후들거린다며 그 때 일을 회상했다. 경찰들이 조사해보니 사실이었다. 일요일 밤이라 워낙 통행량 자체가 없는 때이기도 했지만 사건이 발생한 약 15분가량의 시간 동안 동에서 서로 가는 청계천로에는 차가 전혀 없었다. 물론 반대편 쪽에는 차들이 다니고 있었고 보행자 도로에 드문드문 사람들도 있었다. 경찰들이 출동하게 된 것도 건너편 사람들의 신고 때문이었다. 경찰차는 중간에 경수의 경로에 진입하려다 몇 번을 놓치고 겨우 세종대로쪽 입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게 된 것이었다. 경수는 자신 역시 신고를 위해 휴대폰을 꺼냈으나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전화기를 놓치고 말았다고 진술했다. 경찰들은 수족관이 즐비한 상가 건물 근처에서 깨진 휴대폰 하나를 발견하였다. 경수가 진술한 지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고서 경수는 더욱 당혹감을 느꼈다. 용기를 내서 멈춰볼까 말까를 고민하는 사이 그의 오토바이는 휴일 통행금지를 표시하는 플라스틱 삼각대를 뚫고 지나갔다. 광통교 부근의 청계천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땅이 찢어지면서 튄 돌멩이 등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다행히 둘둘 말린 덩어리는 착실하게 경수의 오토바이만을 따라 간 것인지, 직선 도로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왜 중간에 옆길로 새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경수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제가 만약 나래교나 수표교 따위를 넘는데 그 놈이 거기도 따라왔다면 무게 때문에 다리가 무너졌을 걸요? 몇 번 그럴까 생각은 했지만 반대편은 다니는 차들도 있었고, 암튼 그놈은 제 뒤에 너무 바짝 붙어 있었다니까요.”
경수의 말은 타당성이 있었다. 그것의 직경은 거의 오십 미터에 육박하고 있었고 무게를 상상할 수 없는 콘크리트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사건 때문에 나라 전체가 들썩였다. 경찰들은 우선 경수에게 몇 가지 경범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 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어떤 교통 카메라에도 경수가 신호를 위반하거나 규정 속도를 초과한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다. 게다가 경수가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달렸다 하더라도 당시의 응급상황을 고려했을 때 큰 죄를 부과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 땅이 깨지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 오토바이 머플러의 구조 변경 역시, 소음 측정기 결과 80 데시벨을 초과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다. ‘부주의’ 어쩌고로 시작된 질문 역시, 누가 달리면서 매번 뒤를 돌아다보느냐는 경수의 조리 있는 반문에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서울의 자랑이며 시민들의 위안이라는 청계천로의 한쪽 길은 도륙당한 고기의 살처럼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과일 껍질처럼 땅이 벗겨질 수 있다는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땅 밑에 묻혀 있던 철근이며 배수관로가 훤히 내비쳤다. 마장동 부근에서 광화문까지 연결된 도로가 전면 통제되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반대편 차로는 물론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청계천변의 다리들은 모두 차단되었다. 차들이 해당 구간을 경유할 수 없게 되자 서울 전체의 교통 혼잡은 예상을 초월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인근 상인들과 시민들의 불만의 소리가 끓어올랐다. 건설교통부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각종 과학 단체에서 땅덩어리 혹은 돌덩어리로 불리는 그것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지만, “땅이 두루루 말렸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어떤 새로운 정황도 포착할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일부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기다려 마지않았던 종말의 도래라 짐작했음인지 개탄을 금치 않으면서도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인간성을 상실하며 개발로만 치닫는 현 작태를 하늘이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환경 단체도 만만치 않게 깃발을 높이 세웠다. 생태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고 미관과 전시 효과만을 고려한 정부의 시도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녹색 옷을 입고 덩어리가 멈춘 곳에 모여들어 집회를 열었다. 거대한 달팽이 껍질처럼 말려 있는 도로를 보고 예술의 초극을 꿈꾸는 젊은 집단이 단체로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청계천의 역사를 연구하는 단체들이 숨은 비밀을 밝혀내야 한다며 새로운 조사 기관을 위한 보조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무속 연합에서는 광통교에 떠도는 신덕왕후의 원혼이 들고 일어난 것이라며 전 국민이 참여해 큰굿을 벌여야 한다는 내용의 연판장을 돌렸다.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개인과 단체들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침내 정치권의 공방이 시작되었다. 연관 있는 부서 장관들의 개인적 비리가 공개되었고 여당과 야당간 책임 논란이 일었다. 어떤 절차와 방법에 의해서든 누군가는 사태를 짊어져야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희생양이 될 만큼 약하고 어리숙한 사람은 드물었다.
모종의 힘들이 경수를 지목하였다.
경수는 일단 무죄방면 되었지만 취조와 탐문을 위해 경찰서와 법원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청계천과 그의 이름 석 자가 인터넷에서 검색어 순위 1위로 올랐다.
나이 28세. 거주지 마장동. 동대문 신평화시장 마네킹 도매업체 직원. 고향……. 취미……. 애정 관계…….
경수와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증언이 언론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소개 되었다. 동대문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서점에 가기를 좋아했다는 점이 알려지자마자 비의적 음모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댓글을 난사했다. “그에게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최종 결론이었다. 경수가 사는 마장동 월세집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우시장으로 유명한 그 동네에는 소의 원한이 사라지지 않는 몇 군데의 거점이 있는데, 경수가 세 들어 사는 집이 바로 그 거점 세 곳이 합쳐지는 지점이라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의 고향에서 내려오는 ‘말하는 숲’ 전설을 인용하고 그럴 듯한 괴담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가 언젠가 버들 다리 위에 있는 전태일 동상을 어루만진 적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다른 사람은 그 사실로부터 종북주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경수가 근무하던 마네킹 업체는 몰려든 기자들로 몸살을 앓았다. 그 와중에 전위예술을 한다는 미인 예술가는 벌거벗은 존재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며 마네킹으로 변장해 청계광장에 서있기도 하였다.
경수의 일상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그는 동대문 시장의 여러 가게들을 전전하며 점원으로 일했다. 신발 도매 상가에 있기도 하였고, 공구상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전문 기술은 없었으며 주로 판매와 배달 업무를 하였고 ‘다방’이라는 간판이 달린 곳에 가끔 들르곤 했다. 열여덟에 고향을 떠난 뒤 십여 년, 마장동 일대의 월세방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지만 납입금 이백만원이 채 되지 않는 주택 통장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시장에서 알게 된 동료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날린 일도 있고, 가장 오래 일했던 타일 가게에서는 밀린 월급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가 걸어온 길에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다는 게 이상할 뿐일 정도로 경수의 생활은 평범했다. 하지만 경수에 대한 조사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거대한 덩어리는 여전히 청계광장에서 꼼짝을 않고 있었다. 즉시 그것을 치워야 한다는 의견과 역사적 사건의 기념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팽팽히 맞물려 덩어리의 거취는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교통은 여전히 엉망이었으며 일대를 오가야하는 많은 시민들의 불평은 높아가기만 하였다. 정치권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누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지에 대한 홍보성 제작물들이 사이버 망을 떠돌았다. 모두의 분노가 응집되어가고 있었다.
경수가 가장 의심을 받는 부분은 왜 하필 그 시간에 책을 사기 위해 청계천변을 이용해 교보문고까지 갈 생각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경수는 명쾌하게 “교보에는 책이 많잖아요”라고 대답했지만, 그렇게 간단명료한 동기는 쉽게 용인되지 않았다. 경수를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허무맹랑한 자 하나가, 그 동안 경수가 산 책의 목록을 내려 필요한 몇 개의 단어들을 발췌하기 시작하였다. 열망, 동경, 바람, 제 자리, 모순, 새로운, 기회, 영원……. 여러 차례의 재판이 열렸다. 아무런 범법 행위도 찾을 수 없다는 처음의 판결과 달리 경수는 형법 제 87조 내란죄와 115조 소요죄 등에 의해 국가의 존폐를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정을 받았다. 걱정 말라며 싸워보자던 국선 변호사는 판결 직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경수는 창살 안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책이 많잖아요”라는 말 외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아서 사태가 이리 된 것은 아닐까 고민해보았다. 어쩌면 그가 서점에 너무 많이 들락거린 것이 화근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경수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서점의 여직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기로 하였다. 이유 없이 그녀의 사진이 인터넷 사이트에 오르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경수는 서럽고 암울한 마음이 되었다. 스물여덟 해를 멋지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사람 아닌 자신에게,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덩어리는 어째서 할리 데이빗슨 같은 오토바이를 따라가지 않은 것일까? 왜 한강이 아닌 청계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청계천변에서 한가로이 데이트를 해 본 적도 없는 자신이 어찌해서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수는 그 밤을 떠올려보았다. 이상한 길 덩이에 쫓기며 청계천로를 달리다가 문득 건너편에 뜬 초승달을 본 기억이 났다. 지치고 비루한 일상들을 숨긴 불 꺼진 건물 위로 번뜩거리는 달이 떠 있었다. 경황없었던 그 순간에 어째서 그것이 눈에 들어왔을까? 그 가느다란 달은 마치 지금 경수가 있는 이 차가운 바닥처럼 생소하고 매정하게 느껴졌었다.
 
경수가 옥에 갇혀 눈썹 같은 달을 떠올린 바로 그 순간, 서울 시내, 전국 곳곳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도로가 깨지면서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원단을 배달하는 오토바이며 환자를 수송하는 구급차, 음악을 크게 튼 승용차나 피자 배달 오토바이 뒤로 길이 깨지며 말려왔다. 마치 파를 채칼로 길게 썰 때 껍질이 도르르 말리는 것처럼 길들이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경수가 그 날 밤 잠시 청계천로를 달렸던 딱 그 시간 동안, 전국의 수많은 길들이 동그랗게 말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경수의 오토바이 단 한 대였을 때 그렇게도 말이 많았던, 그리고 어떻게든 책임을 덮어씌우고야 말았던 그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 혹은 운전하고 있는 길 또한 언제 동그랗게 말려버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돌돌 말린 길덩어리들은 사람들의 동요나 불안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잠잠했다.
경수는 다시 무죄방면 되었다.

신의 길

신의 길
심아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천지를 창조하기 전, 신은 흑암, 혼돈, 공허라는 세 벗과 함께 있었다. 신과 벗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란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요한 산책을 하곤 했다. 벗들은 신의 창조에 대해 근심이 많았다.
 
한 점의 얼룩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검은 흑암이 신의 계획을 통곡으로 만류했다.
“도대체 왜 자청해서 일을 벌이시려는 거죠? 저는 이대로도 충분히 좋은데…….”
흑암은 신이 무엇을 구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과 정확히 반대되면서 동류인 짝, 빛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흑암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했다.
“빛은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말 거여요. 숨겨져 있던 고결한 비밀을 티끌 하나까지도 찾아내려 하겠죠.”
신은 말없이 흑암을 어루만져 주었다. 흑암은 신이 구상하는 처음은 알 수 있었지만 그 끝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역시 자신처럼 괴로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혼돈이 축 쳐져 있는 흑암을 등 떠밀며 신께로 나아왔다. 그의 주변에서 소란한 파장이 일었고 순식간에 동요와 불안이 솟아났다.
“전 당신이 하려는 일에 찬성해요. 우리 모두는 당신이 만든 만물에 깃들어 그 세상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볼 수 있겠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혼돈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는 불의와 정의, 선의와 악의, 기쁨과 슬픔, 진실과 거짓 등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형태의 귀퉁이 한 부분, 의미의 작은 토씨 하나만 틀어도 그것들은 쉽게 변질되어 버릴 터였다.
하지만 시니컬했던 혼돈은 자신이 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의기양양하던 태도를 버리고 갑자기 의기소침해져서는 걱정스레 신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계획을 접어버리세요. 우리들로 이미 완벽하지 않나요?”
신은 이번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혼돈은 그의 눈에 어린 단호함을 읽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은 종류가 다른 완벽함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의 고집은 곧 그의 본질이므로 아무도 꺾을 수가 없다. 혼돈은 가학과 피학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신은 이제 공허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그가 차분하고 끈질기다는 것을 알기에 신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마침내 끝도 시작도 없는 길에서부터 걸어왔다는 듯 피곤해 보이는 공허가 신을 불렀다.
“왜 저희들을 모두 없애버리시고 그것들을 만드시지 않는 겁니까?”
신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공허는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고 다시 물었다.
“흑암과 혼돈이라도 떼어내 버리세요. 저만 있어도 충분히 새로운 세상을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공허는 ‘아니면 흑암과 혼돈을 두고 저만 없애시든지요.’라고 말하려다, 신이 이미 자신의 대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입을 닫았다. 처연하고 건조한 부동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신이 자신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세 벗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에는 세 벗과 완벽히 다르면서도 다른 차원에서 동일한, 놀라운 세상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신감이 흘렀다.
 
그리고 아둔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면에서 적절한 세월이기도 했다. 신은 이제 자신이 만든 세계와 세계를 넘어서는 다른 곳을 두루 오가고 있었다. 예상대로 흑암과 혼돈과 공허는 뜨거운 커피에 녹아드는 설탕처럼 세상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명암이 조금 변했을 뿐인 흑암과 형태에 약간의 변화만 가해진 혼돈, 그리고 순수하게 압축되었을 뿐인 공허가 가끔씩 신의 길에 나타나곤 했다.
“조금 하얘진 것 같기도 해요.”
흑암이 말했다.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혼돈이 말했다.
“창조 전이나 후나 다를 게 뭐여요?”
공허가 말했다.
신은 자신의 본질인 고집을 꺾지 않으며 다만 그윽한 미소로 그들을 응대할 뿐이었다.

그저 우연일 뿐이겠는가?

그저 우연일 뿐이겠는가?
심아진
 
지독한 냄새였고 견디기 힘든 추위였다. 또한 온몸이 진딧물의 수액처럼 묽게 녹아내릴 듯한 더위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거무튀튀하고 끈적거리는 늪 속에서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의지로 20개월을 버텼다. 아무도 우리들이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우리들이 이런 곳에 버려진 것인지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 누군가를 알지도 못하였거니와 우리에겐 심지어 말을 할 수 있는 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은 이룰 수 없으니 가지는 게 분명하다고 믿고 체념할 무렵, 희망이 보였다. 탄력이 강한 무언가가 우리 모두를 삼켰고,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놈의 장 속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양분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도록 몸에 붙은 섬모를 제거하고 새로운 피부를 만들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우리 모두를 이끌고 있었다.
 
겨울잠에서 깬 후 오랜만에 포식을 한 달팽이는 과식의 후유증을 톡톡히 겪었다. 똥에 양분 외의 무언가가 더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내내 속이 더부룩하였고,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이전보다 더 천천히 먹고 더 느리게 움직였지만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있던 곳보다는 확실히 나은 곳이었다. 어두웠기 때문에 더 이상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으며, 기분 좋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습하고 따뜻했다. 작은 행운에 너그러워진 우리는 스스로를 혹은 형제를 해치며 퇴행하는 대신 수차례에 걸쳐 더 나은 모습으로 거듭났다. 미라키듐, 스포로시스트, 레디아, 세르카리아…. 복잡한 이름들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들이 모두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서 쏟아진 무수한 우리 자신들을 보며 혼돈에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즉 나이기도 한 우리, 그리고 우리이기도 한 나는 또 누구인가? 이관규천以管窺天. 좁은 소견으로 주변을 둘러보아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수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주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표면적으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긴 꼬리였다. 그 누구도 꼬리의 쓰임새를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일단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감사한 보람이 있게도 그 꼬리는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부작침磨斧作針. 우리는 빈약한 꼬리를 휘둘러 뚫릴 것 같지 않은 놈의 장에 딸린 샘을 지나 마침내 허파로까지 이동하였다. 형제 몇이 죽어 나가는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으나, 결국 해냈다. 희망이 더 이상 희망으로만 남지 않았던 상황, 곧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던 상황을 이미 한 번 경험한 우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증세를 넉 달이나 겪은 후 달팽이는 마침내 심한 호흡 곤란을 느끼며 가래를 뱉어냈다. 자신을 괴롭히던 무언가가 간신히 떨어져나간 것 같았다. 기운이 빠진 달팽이는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 한 채, 죽은 듯 늘어져 있었다. 뱉어낸 가래에서 수많은 작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눈이 나쁜 달팽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달팽이는 그저 속이 편해져서 다행이라 여기며, 알고 싶지도 않은 세상을 내버려둔 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외부 공기는 시원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다시 이전보다 더 좁고 갑갑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십밖에 안 되는 적은 무리로 나뉜 우리는 잠시 불안감을 느꼈지만, 어쨌거나 가야할 곳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를 이끄는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적절한 체념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개미는 자신도 모르게 끈적거리는 것을 후루룩 들이마셨다. 하얀 거품에서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감칠맛이 났다.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잊은 채, 개미는 생소한 행복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몸 전체가 양분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엄청난 단백질 공급원인 달팽이의 냄새가 입안에 가득했다. 달팽이를 통째로 먹고 둥지에도 가져갔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멀리 있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 만 했다.
 
이제 오십이나 되는 나머지 형제들의 생존은 모두 내게 달렸다. 형제들은 더 이상 나를 불신하지 않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나 스스로 나를 신뢰하여 생긴 결과였다. 형제들은 무사히 새로운 곳으로 옮겨온 것을 모두 내 덕으로 돌렸다. 전 지휘권을 내게 넘기고는 그간 피폐해진 건강 상태를 돌보기 위해 자신들에게 적절한 공간들을 찾아 나섰다. 최소 2개월. 그 안에 우리가 자리 잡은 이 새로운 몸뚱이를 어떻게든 길들여야 했다.
하지만 녀석을 길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간 겪었던 냄새도 비좁음도 지금 발휘해야 할 인내에 견줄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는 녀석과 내가 거의 하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충분히 먹지 못한 형제들이 힘을 잃어갈수록 나는 더욱 초조해졌다. 지쳐갔기 때문에 의구심도 깊어갔다. 우리는 왜 또 다시 다른 어떤 곳으로 가야 하는가? 더 나은, 더 풍부한 곳으로 가면 이 굶주림이 끝나고 이 미칠 듯한 갈증이 끝이 날까? 그리고 마침내 그 어떤 애면글면한 조바심 없이 완벽하게 평화를 누리게 될까?
 
보름달이 동그랗게 뜬 밤, 겁도 없이 한 마리의 개미가 대열을 이탈했다. 그는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싱싱하고 보드라운 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달과 가까이 갈수록 위험에 노출 될 확률이 커지지만 개미는 이미 무아지경에 이른 듯하다. 마침내 그의 단단한 집게턱이 풀을 꽉 물었다. 그대로 동상이 되어 버린 듯, 개미는 동이 트기까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오늘도 간신히 녀석을 조종해 제 무리로 돌려보냈다.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 발각되면 녀석은 사지가 찢기는 참형을 당해야 할지도 몰랐다. 또한 한낮의 태양 아래서는 녀석만 타 죽는 게 아니라 우리까지 녹아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서둘렀는데도 녀석은 답답하게 움직였다. 그를 덜 미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또 완전히 미치게 만들어서도 안 되었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 그의 일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일은 중요했다.
 
밤이 되자 개미는 다시 한 번 대열을 이탈해 풀잎 위로 기어올랐다. 근처에 있던 개미가 잠시 이상하게 여기는 듯 했으나, 다행히 그를 주시하지는 않았다. 별과 달과 바람이 속삭이는 시간들이 더디게 흘렀다. 개미는 어찌하여 자신이 온 몸이 경직된 상태로 풀끝에 매달려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그다지 기억에 남지도 않는 것처럼 지금의 상황도 일어나는 내내 모호하기만 했다. 풀에 매달려 있는 것이 과연 자신이 맞는 것인지, 자신의 단단한 입이 정말 풀을 물고 있기는 한 것인지, 모든 것이 아련했다.
 
호미난방虎尾難放. 잡았던 범의 꼬리를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성공을 위해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침 해가 뜨고도 한참을 더 녀석을 장악하고 있었다. 녀석과 마찬가지로 아둔한 녀석의 진영에서는 대원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여느 때처럼 대열을 갖추고 행군을 준비했다. 해는 점점 뜨거워졌다. 기대했던 게 큰 만큼 원망도 큰 형제들이 내게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배신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녀석의 머리에 자리를 잡은 내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 형제가 기어오기 시작했다. 형제는 녀석을 조종해 잠깐의 뜨거움이나마 면하는 게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교각살우矯角殺牛.내 계획이 전부를 몰살시키고 말 거라며, 그는 나를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위엄을 잃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그것은 사실 나 스스로 확신이 서서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달리 누구를 믿겠는가? 사실 나는 벼랑 끝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면 나는 내 지휘권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배고픈 형제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터였다. 하지만 이미 내게 도전장을 던진 그에게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녀석과 내가 서로를 맞잡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사이후이死而後已의 태세로 결전을 앞둔 찰나, 우리 모두는 어둡고 거대한 통로로 빨려 들고 말았다.
 
신중하지 못한 젊은 양은 이른 아침부터 풀을 뜯어 먹는 우를 범했다. 그 풀에 꽉 달라붙어 있는 작은 개미를 보지도 못 한 채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제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또 성급히 움직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맛있는 풀의 향을 음미하고 있다. 잠에서 깨지 않은 다른 양들이 오기 전에 보드랍고 맛있는 풀을 먼저 먹으려는 양의 입은 바빴다. 조기조포충 早起鳥捕蟲! 그러나 일찍 일어나는 새는 더 일찍 일어나는 사냥꾼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양은 아직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미끌거리고 아늑한 그곳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했다. 우리는 험난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축배를 들었다. 배불리 음식을 먹고, 취하고 춤을 추었다. 마침내 우리는 나뭇잎 모양으로 변한 몸을 음란하게 흔들어대며 우리 자신들과의 교미를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자웅동체였다.
번식에서 오는 충만한 행복감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납작하게 눌려 죽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모종의 우울함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충만감과 결핍감을 동시에 느끼며 알을 낳는 순간에, 우리는 여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으나 완전히 우리와 똑같이 생긴 어떤 이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는, 설령 미소를 지을 입이나 입가의 근육이 없다 하더라도 분명 웃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물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일 뿐이겠는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우리를 낳았고, 여태 그곳을 떠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우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랬다. 학명 파스키올라 헤파티카Fasciola hepatica. 우리의 이름은 간충肝蟲이었다. 나갈 준비를 마친 이만 여 개의 알들이 우리들의 몸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겪었던 모든 것을 겪고 다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또 하나의 자신인 우리를 만날 수도 있을 그 알들.
지금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 알들이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우리는 그 어떤 시간도 장소도 사건도 기억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쏟을 뿐이었다. 생이여! 알들은 내게 충성스럽게 손을 흔들며 빠르게 떨어져나갔다. 우리는 눈물을 흘릴 눈도 없고 눈물샘도 없었지만 어쨌든 울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무의미한 우연일 뿐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끝> 원고지 27매

감자와 나

감자와 나
심아진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 말기 바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총각인지, 노처녀인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감자볶음 요리를 하기로 했다. ‘감자볶음’을 검색하고 찾은 인터넷 블로그에서 남편이 어쩌고 아이가 어쩌고 하는 설명이 한참 이어지다가 준비물이 나왔다.
감자 2개, 양파 반 개, 당근 반 개, 양배추 약간, 후추 약간, 양념간장 2, 참기름 1, 통깨 1
어이가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재료들이 아닌가 말이다. 감자볶음에 양파는 왜 들어가며 당근에 양배추까지? 게다가 크기도 다른 채소를 놓고 반 개는 뭐며 약간은 또 뭐란 말인가. 아,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 어디까지나 나 역시 내 식대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다. 그냥 내 기준에서 황당했다는 얘기다.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 있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트라우마 같은 게 있게 마련이다. 가령 당신은 내가 “부등식 (x+y-4)(2x-y+3)≥0을 만족시키는 실수 x, y에 대하여 x²+y²의 최솟값은?”에 대해 이건 기본도 안 되는 문제라고 말했을 때, 황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금방 풀었다고 하더라도 제발 너무 쉽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숫자 놀음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요리를 해 보고자 한 것뿐이다. 거창하지 않은 소박한 감자 요리 말이다.
검색창에 다시 한 번 감자볶음을 입력했다. 화면에 떠 있는 사진 중 감자의 허여멀건 한 색이 두드러진 것으로 골랐다. 그러니까 양배추나 당근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내가 먹겠다는 것은 어쨌든 감자니까 말이다. 나는 곧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알았다. 내가 먹으려는 음식은 ‘감자볶음’이 아니라 정확히 ‘감자채볶음’이었다. 양배추나 당근이 재료에 없는 그 블로그에서는 그렇게 명명하고 있었다. 그렇다. 처음의 실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몰라서였음에 틀림없다. 감자와 감자채의 유의미한 차이. 나는 미묘한 차이 때문에 일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 일이 있다. 제발 감자볶음이나 감자채볶음이나 같은 거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어떤 현상은 뭉개버리고 모르는 체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나는 살짝 이 부분을 넘어가고자 하니, 제발, 눈감아주기 바란다. 아무튼 나는 성급하게 마우스의 스크롤바를 내렸다. 이 요리법을 올려놓은 사람 역시 여름이니 매미니 하는 얘기를 한참 떠들다가 겨우 준비물을 내놓았다.
감자2, 양파1/2, 대파1/2, 굵은 소금, 포도씨유, 소금, 후추, 참기름, 통깨
역시 만만치 않은 재료다. 나는 단 두 번의 검색으로 ‘간단한’ 감자채볶음 같은 것은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다. 오래 고집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것은 결국 감자도 뭣도 없는 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채소의 크기 따위에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고, 여타 다른 식재료에 관해서도 순종하기로 했다. 내게 얼마간의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여러 크기의 감자가 담겨 있는 바구니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겠지만, 결국 현명하게 제일 큰 감자와 제일 작은 감자의 딱 중간 정도 되는 크기의 감자를 고를 것이다. 일본인들에게는 잘 없다는 이 유도리ゅとり. 나는 순순히 양파니 대파니 하는 것들도 결국 감자채볶음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아이에게 실험해 보라. 네 대를 맞을래, 두 대를 맞을래 하고 물어보면, 사는 게 생각보다 거칠다는 것을 인정하는 평범한 아이라면 반드시 두 대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당근과 양배추가 빠졌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안을 받았다. 두 대쯤은 기꺼이 맞아줄 수 있다.
게다가 양파나 대파나 둘 다 파가 아닌가. 나는 작은 위안에도 만족하며 장을 보았다. 실제로 나는 양파 한 망 값으로 삼천 육백 원을, 대파 한 묶음 값으로 이천 팔백 원을 지불했지만, 그냥 묶어서 파 값으로 육천 사백 원을 지불했다고 생각했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심플한 것들이 사람을 얼마나 위로하는가 말이다. 파 육천 사백 원!
그러나 그 다음 장벽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천일염, 구은 소금, 맛소금, 심지어 허브맛 솔트까지 집에 있었지만,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굵은 소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슈퍼마켓의 소금 진열대 앞에서 허리를 폈다 굽혔다를 반복했다. 소금의 화학 기호 NaCl. 이온 결합시 음이온의 크기와 양이온의 크기로 결정의 모양이 정해지는데, Na+이온을 향해 Cl-이온이 소위 xyz 세 방향에서 붙어 있어야 안정된 형태를 띠게 된다. 결정이 굵어지려면 결정들이 모이는 시간이 어느 정도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저온에서 오래 끓여진 것, 즉 염전에서 구한 NaCl이 바로 ‘굵은 소금’이 되는 것이다. 찾았다. 일 킬로그램짜리 배추절임용 소금.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킬로그램이나 오 킬로그램을 사야했다면 정말 갈등했을 것이다. 이러면서까지 감자채볶음 따위를 먹어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이제 슬슬 지겨워진다고 말하지 말라. 뭐니뭐니해도 가장 괴로운 것은 나다.
내게는 아직도 포도씨유와 후추, 참기름, 통깨라는 거대한 관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건너뛰기로 하자. 당신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내가 정말 말하기도 싫을 정도로 지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쇼핑백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쓰레기봉투에 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점원과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진이 빠져 돌아왔다는 것만 말해두고자 한다. 사실 나는 오랜 사유와 번뇌의 시간 끝에 고른 음식 재료들을 쓰레기 취급하기 싫어서 계속 아니오, 라는 말을 반복한 죄밖에 없다. 그 쓰레기봉투가 그 쓰레기봉투인지를 몰랐을 뿐이다. 내가 점원을 무시했다거나 놀리려고 그런 게 정말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요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빗살무늬토기부터 굽기 시작해 단번에 인류의 요리 역사 전체를 경험한 사람처럼 피로해졌다. 뼈가 흐물거리고, 손이 떨려 이러다 정말 암이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필 암이 떠오른 것은 감자가 항암 효과에 탁월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항암 효과를 가졌다는 성분인 알파카코닌과 알파솔라닌은 감자의 껍질과 싹에 많이 들어 있는데, 조리시 거의 제거되어버린다. 그럼 감자를 껍질 째 삶아 먹든지, 생으로 갈아 먹으면 고생도 하지 않고 좋지 않았겠냐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비이성이나 억지라고만은 할 수 없는 성향 혹은 취향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모서리가 둥근 지갑이나 노트를 사야만 만족하고, 누군가는 꼭 문을 등지고 앉아야만 마음이 편하다. 앞머리를 내리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 있고, 단추나 지퍼를 모두 잠그면 답답해서 미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무조건 감자채볶음이 먹고 싶다. 그러니 관심과의 구분이 몹시 애매한 간섭이라면 거두어 주시라.
아무튼 나는 감자를 내 식대로 먹기 위해 꺾이려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조리대에 섰다. 먼저 다루기 쉬운 과도로 감자를 돌려 깎았다. 푸르스름한 독은 보이지 않았는데, 보였더라면 얼마만큼 도려내야 인체에 득이 될지 해가 될지를 가늠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푸른 싹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조심해야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때문에 약간 서운해졌다. 그렇다니까. 인간은 아주 약간이라면, 스트레스를 반기기도 한단 말이다. 무병장수하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 은근히 비운의 주인공처럼 요절하기를 바라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맞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로 누가 좀 때려줬으면 하고 기대를 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란 말이다. 당신은 아니라고? 그래, 그래. 성향이니 취향 얘기를 한 것은 나니까, 이쯤에서 넘어가는 게 좋겠다. 요리를 계속 하자.
나는 인터넷에서 시키는 대로 감자를 채 썰었다. 굵게? 가늘게? 그냥 내 성향과 취향대로 썰었다. 그리고 잘 썰다가 내 손톱도 하나 둘 같이 썰었고, 급기야 살도 조금 썰었다. 물론 엄청나게 아팠다. 하얀 감자가 빨갛게 변할 만큼은 아니었고 그저 연한 살구색이 될 정도로 피가 났지만, 아무튼 꽤 따끔거렸다. 검지의 손톱 아랫부분. 한참 지혈을 한 후, 나는 도대체 감자를 어떻게 쥐고 칼을 어떻게 썼길래 베인 것인지를 알기 위해 동작을 재현해보았다. 마치 범죄자가 범죄 현장에 다시 가는 것처럼, 나는 조금 전의 내 행동을 흉내 내보았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숭고한 본능 중 하나다. 물론 일부러 확대해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단지 궁금했던 것이다. 어째서 납득할 수 없는 부위가 칼에 밸 수 있었던 것인지를. 그것은 도저히 그럴 수 없으리라 여겼던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처가 난 부위는 결코 상처가 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맙소사! 이런 때 드는 게 자괴감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처럼 잘 잊는 유전자의 힘을 빌어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였다. 우선 밴드를 손가락에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 썰다 만 감자를 왼손에, 칼은 다시 오른손에. 나는 마음을 다스리며 칼질을 겨우 마치고, 안내문에서 시키는 대로 감자를 물에 담갔다. 녹물을 빼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다음으로 양파와 대파 썰기. 예상했겠지만 쉽지 않았다. 맙소사. 내가 흘린 눈물의 양을 봤다면 틀림없이 내가 양파와 파의 죽음을 애도해서 그렇게 울었다고 할 것이다. 나는 눈이 벌게진 채, 주방에서 가능한 먼 곳으로 이동해 티슈로 눈물을 닦아냈다. 사는 게 왜 이런지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눈물을 쏟고 나니 사는 게 왜 이런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울다 지친 인형처럼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물에 잠겨 있는 감자가 나를 불렀다. 야!
팬에 포도씨유를 두른 후, 물을 빼고 체에 건진 감자를 쏟아 부었다. 지지직. 소리만 요란한 게 아니었다. 기름과 물이 서로를 경멸하며 튀어 오르는 힘이 엄청났다. 뜨거운 기름에 물이 닿으면 난리가 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도 본 바가 있는 사람인데, 왜 몰랐겠는가? 그러나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지나치게 감자에 집중했기 때문에, 체에 걸렀다 하더라도 남아 있을 물을 간과했던 것이다. 눈두덩과 광대뼈 부근이 따끔거렸다. 피부가 살짝 벗겨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손으로 따끔거리는 부위를 비볐다. 곧 실수를 깨달았지만 양파와 대파의 유황 성분이 더 빠르게 손에서 눈으로 옮겨간 뒤였다. 눈이 아리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앞이 흐릿한 가운데 간신히 벽을 더듬어 욕실로 갔다.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고 눈을 헹구고, 다시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세상이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내게 왜 교훈 같은 것을 주려는지 왜 시험 따위가 필요 없는 나를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지 세상에게 따져 물으면서, 나는 비틀비틀 욕실을 나왔다. 하지만 내가 겪어야 할 악운이 아직도 한 줄 더 하늘에 쓰여 있었던 모양이다. 중불로 줄여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을 감자가 센불에서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림에 지쳐 흘렸을 감자의 눈물이 매캐한 연기로 기화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그래,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감자채볶음을 먹지 못한 인간의 기력이라는 게 결국 이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원고지 30매. 마지막으로 질문하시라. 그 후로 감자채볶음을 다시는 하지 않았느냐고? 당연히 하지 않았다, 라고 답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러지 못했다. 똑똑한 인간이라면 깨끗이 포기했겠지만, 똑똑하지 않은 나는 미련함과 도전정신을 쉽게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블로그 찾는 것은 두 번 만에 쉽게 포기하더니, 감자채볶음은 왜 그러지 못했냐고? 똑똑하지 못해서 그랬다니까 그러네. 그냥 상황 따라 쉽게 변하고 한없이 모순된 게 인간이라고 해 두자. 뭐? 일반화시키지 말라고? 그래, 그래. 알았다. 개인의 특성이 군집의 특성을 능가한다는데 언제나 동의하는 나다.
사실 이론상으로 남은 변수랬자 소금의 문제나 마늘의 문제 등 몇 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재료에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수와 모든 재료의 수를 곱하면, 아니 숫자 놀음은 하지 않기로 했지. 어쨌든 ‘그까짓 감자채볶음’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다시……. 알고 싶지 않다고? 나 역시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야기는 끝을 내야 하니까 말이다. 이런 경우에 미국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던데. 블라블라.
블라블라, 모두 실패했다. 나는 결국 감자채볶음을 포기했다.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쯤에 참다못한 감자가 채 썰리던 도마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말했던 것이다.
이 감자만도 못한 인간아!
순간 나는 왜 썰린 감자채가 아니라 반쯤 남아 있던 감자 덩어리가 그렇게 말을 한 것일까 묻고 싶었다. 감자채들이 입을 모으는 것보다 묵직한 덩어리가 한 마디 던지는 게 나아서? 아니면 감자채는 감자의 본질이 아니라서?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나는 하얗게 질린 감자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감자에게 감자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 역시 원해서 이렇게 생겨먹은 건 아니다. 감자에게 어찌할 수 없는 삶이 있는 것처럼 내게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해 하겠니, 못난 감자야?

진심

진심
심아진
 
이렇게 살면 안 돼. 우린 좀 더 투쟁적일 필요가 있어. 제도권에 속하지 못한 인간은 물렁해지고 납작해져서 겨우 체제가 필요로 하는 손수건 한 장이 될 뿐이니 말이야. 그 손수건으로 땀도 닦고 코도 푼다고? 그래, 가끔 빙빙 돌려 목에 감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별 수 있어? 그냥 손수건일 뿐이지. 급할 때는 용변을 처리하는 휴지로 전락될 수도 있는 게 손수건 한 장이야.
라이프니츠는 상대적인 우리 세계를 ‘신의 지성 안에 묻혀 있는 거대한 신비’에 의해 실존하는 유일한 세계로 보면서 두 세계가 결코 공존가능하지 않다고 보지. 라이프니츠를 해석한 들뢰즈에 의하면 죄인인 아담과 죄인이 아닌 아담은 모순 관계인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인 아담이 사는 세계와 죄인 아닌 아담이 사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상정해야 해. 나는 여기에 동의해. 두 세계는 공존불가능해.
세상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그림 따위를 보는 것은 사치야. 회화에서는 모든 개성들이 동시에 함께 일어나 우리 앞에 펼쳐지지만 시문학에서는 그렇지 않아. 시문학은 동일한 총체성이 되지 못하고, 표상은 그 속에 내포된 다양한 것을 순차적으로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지. 사실 이것은 결점이기도 하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결점이야. 말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특성들이 순차적으로 나오더라도 그것들을 통일시키고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해서 표상의 이미지 속에 정착시킬 수 있기 때문이지. 時文學은 文學이고, 또 學이야.
정말 우울해. 살고 싶지 않아. 왜 정언명제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어. ‘담배는 몸에 좋다’는 건 전칭긍정이야. ‘어느 담배도 몸에 좋지는 않다’가 전칭부정, ‘어느 담배는 몸에 좋다’가 특칭긍정, 그리고 ‘어느 담배는 몸에 좋지 않다’는 특칭부정이 돼. 이게 어려워? 이 정언명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가언명제나 선언명제는 어떻게 이해하겠어? 아무리 어려워도 이렇게 무지막지한 세상에 맨 몸으로 나가는 것 보다 어렵진 않을 거 아냐. 이해를 못하겠어. 난 지쳤어.
 
…….
 
나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투쟁적이어야 한다며 손수건에 관해 한 말은 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기득권에 속해야 한다.”는 엄마의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츠의 공존불가능성은 한 마디로 “그런 애랑 놀기만 해 봐.”이고, 칸트에서 훔쳐 왔을 시문학에 관한 명상은 그저 “스마트폰을 없애버려야 공부를 하지.”라는 푸념에 다름 아니었다. 마지막 단락은 당신도 알 것이다.
세상에, 담배를 피우다니!(담뱃값도 올랐는데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엄마, 제발 제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 ‘엄마’라는 이름을 주어 감사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사실 전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기도 무서워요. 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학교 가는 제 뒷모습만 보아도 가슴 뻐근해진다고도 하지 마세요. 어디에 있든 담배를 피우지 않고서는 진정이 되질 않는단 말이에요.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제 편이라고 하지 마시고, 저를 믿고 응원한다고도 하지 마세요. 결국 다른 애들 다 밟고 넘어서라는 얘기잖아요. 실수해도 넘어져도 좌절만 하지 않으면, 멈추지만 않으면 다 괜찮다구요? 맙소사, 어디까지 저를 몰아붙이실 건가요? ‘나 하나쯤 늙고 볼품없어지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이 최악이어요. 제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세우고 있으니 그렇게 늙고 흉해지는 거여요.
이 모든 것을 용납하지 못 하겠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받아들여주세요. 엄마가 아무리 정의롭고 소신 있으며, 논리적이고 지적인 척 얘기해도 저는 엄마의 진심을 알아요. 엄마는 결코 엄마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이렇게 적힌 편지를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
엄마, 죄송해요.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어찌하겠느냐 말이다

어찌하겠느냐 말이다
심아진
 
우리 집 강아지는 밖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한다. 가끔 창을 통해 거리를 내다보는 모습을 보면 호기심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산책을 나가자고 말하면 야단맞을 때처럼 몸을 납작하게 엎드리고 애처롭게 죽는 시늉을 한다. 저나 나나 건강을 생각해야 하니, 억지로 차비를 하고 나간다. 아무도 없는 길은 잘 다닌다. 새로운 냄새도 맡고 신선한 공기도 쐬고,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사람이나 동물이 나타나면 움직이지 않고 격렬하게 짖는다.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녀석이 말 안 해도 나는 안다. 그러니 산책은 늘 강아지의 산책이 아니라 녀석을 안고 다니는-안으면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짖지 않는다- 나의 노동으로 끝나고 만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할머니 선생님께서 전근을 가셨다가 다시 우리 학교로 오셨다. 그분께서 반색을 하며 나를 아는 체 하셨다.
“정말 대단한 아이였어요.”
교무실에 계신 여러 선생님들을 둘러보며 꺼낸 첫 마디였다. 얘기인즉슨 당시 자신이 여러 번의 수술을 거쳐 몸이 너무 아파 말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어린 내가 눈빛만 보고도 선생님이 원하는 걸 알고 야무지게 해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눈빛만 보고도’를 여러 번 강조하셨다. 칭찬해 주시는 소리였지만 나는 부끄러워 얼른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겨우 아홉 살, 무슨 눈치가 그렇게 빨랐던 것일까? 선생님의 칭찬 아닌 칭찬은 오랫동안 나를 자괴감에 빠뜨렸다.
중학생이 되었다. 작은 동네여서인지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 중 많은 분들이 가까운 나의 친지들과 아는 사이였다. 신경 써주느라 굳이 친지들을 들먹이며 불러내는 선생님들 때문에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무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은데 상황은 자꾸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특히 인기 있는 남자 선생님의 관심은 그대로 내게 독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필요 없는 변명을 해대느라 진땀을 뺐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재수가 없었던지, 시골 동네에서 한 번 날까말까 한 수재 선배의 뒤를 내가 이어야 했다. “선배의 발자취”를 따라 그가 참가했던 모든 대회를 나도 참가했다. 대부분 예선에서 탈락했고 나는 학교 명예에 먹칠을 하는 후배가 되었다. 최악은 장학퀴즈였다. 정답 ‘신선로’를 ‘전골’이라고 답한 뒤로 나는 방송이 끝날 때까지 혀를 내밀었다 넣었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바보 같은 내 얼굴이 시골 동네에 알려졌다. 내가 결코 원한 게 아닌데 말이다.
대학생이 되었다.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울까봐 강의가 끝나면 허둥지둥 책을 챙겨 기숙사로 달아났다. 꼭 가야만 하는 것인 줄 알고 갔던 전체 M.T를 제외하고 더 이상 단체 생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처럼 캠퍼스에서의 내 걸음은 지나치게 빨랐다. 마지막 학기에 촬영 실습을 하면서 다시금 브라운관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기겁을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진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실습실을 폭파시켜 버리고 싶었다.
이제는 안다. 내가 왜 과민하게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썼는지, 왜 그들의 생각을 크게 느꼈는지, 왜 밤새 잠을 못 이루며 시시한 것들을 곱씹고 있었는지를 안다. ‘나’, 이 세상에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나의 조각이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자 했을 때, 혹은 억지로 바꾸고자 했을 때 나는 늘 진땀을 흘리며 이전보다 더 혹독한 자학을 일삼아야 했다. 그래서 마음을 좀 바꿨다. 그냥 생긴 대로 살자.
아마 그런 자포자기가 소설을 쓸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심하고 예민하며 과대망상을 일삼았던 시간들이 결국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지금의 내 소설이 편집증적인 폐쇄성을 보인다고 한다면,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폐쇄성을 딛고 일어서서 심미적 개방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해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문학은 꼬질꼬질하고 빈약한 세계도, 헌걸차고 호방한 세계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커다란 문학이다. 지금의 나는 그런 문학을 의지한다.


  날이 좋아지면 강아지와 산책을 좀 더 할 것이다. 자주 데리고 나가면, 열 번 짖을 거 한 두 번쯤 덜 짖지 않을까. 그러나 많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 집 강아지는 동네의 모든 사람들에게 반갑게 꼬리를 치는 그런 강아지는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아지는 주인을 닮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많이 노출시키지 않은 내 탓일 것이다. 그러나 대신 집에서 장난감으로 놀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는 걸로 만족하지 않을까? 강아지의 마음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 어찌하겠느냐 말이다. 이렇게 소설을 쓰고 있는 걸 어찌하겠느냐 말이다.

2015년 6월 16일 화요일

Returning

Returning
 Ahjin Shim
The man's mother poured out the pack of apples, without appearing any exasperation on her face. Contrast to that kind of moderate gesture, the shinning red apples are falling down with a mournful noise. The easily bruised and deeply broken sound echoes in the street. The woman watches the apples tumbling down the slope helplessly. Even though he wanted to buy only ten apples, she insisted on buying twenty……. The woman had a greed saying that his mother would like the apples as she would. The reason why his mother doesn't take the apples is just there are too many apples. The woman hopes to believe that.
The apples happen to scatter busily toward their own way without any considerance of the regretful gaze of the woman.
"Mother……."
The man who has expected his mother to give hospitality to the woman like him, looks at his mother in a flurry. His pupils with no focus under the short eyelashes reveal the incompetence from what someone who has misunderstood for a long time happens to understand for the first time. He is sincere and futile like a man who is eager to remember the phone number which he can never remember. The man's mother recites the common words which are not matched for her serious voice.
"It is possible over my dead body."
The woman runs after the traces of the apples which are tumbled down. Some go to the first alley and others go to the second alley so all of them have gone out of sight. As the road is curved, no more apples can be seen. The man's house is located on the area where is indifferently high and inclined too much. Out of the twenty apples, there is nothing remained at the woman's feet. The apples which the man's mother would liked disappeared in front of the woman whom the mother doesn't like. The woman realizes that she can never get married to him.

Three years have passed.
The man marries another woman whom his mother likes.
Nobody knows whether it is because that the man loves his mother more whom he has lived together for thirty years, or he laughs at his incapacity by himself, or he feels that love is worthless in his life. Anyway the man has left the woman. The woman doesn't blame him. She gets a little rough and just a bit stronger. The man gets his house far away from the mother's house.

Another three years have passed. The woman who's married to other man doesn't eat any apple. Because she doesn't eat apples, her family doesn't eat apples either. The woman can only see apples in her dream. The haughty apple which has hidden the brown bruise swallows the time of the woman who has awaken from her dream. Sometimes the woman carves the bruise in her chest that the apples had. And sometimes she drools over the crunchy texture that the apple might give. The woman who doesn't eat apples feels odd that the same general life like other person's is held on for herself.

One day after another ten years have passed, the man holds his mother's funeral in a hall affiliated with a university. The man who thinks of the woman in front of the portrait of his deceased mother doesn't regards himself as an immoral person. Suddenly the man wonders the chases of apples which were scattered over at the meeting day of his lover and his mother. Where have the apples, having flown like water down to the sloping road, gone? The man regrets that he hasn't started to find the apples more earlier. He feels pain under his ribs which might be split. Carved pain long time ago. The scent of chrysanthemum opens the retreat path of memory which has been ambiguous till so far. The man is encroached by his old memory nakedly. Even though he wears a hemp hat for mourning on his hair getting gray, but he is not good at hiding his feelings as before.

The man visits his mother's village which he ceased to visit for a while, to find the place which he bought apples sixteen years ago. But there is not the old fruit-store any more where used to have a lot of fruits. Instead, there are a green grocery where young bachelors sell vegetables, an organic product shop, and a small super market. The man drops into here and there to buy apples. He buys about twenty apples.
His mother's house which was seen in the distance is not dignified like it used to be. It looks discouraged, as if it has already known to be sold with an unreasonable price sooner or later. However, the road is still very steep and arrogant. The man looks around very carefully, expecting to find the apples that had disappeared sixteen years ago. One of the apples might knock the sleek windows of his house. One of the apples might hide in the bookstand of his office where he obtained an especially quick promotion. And one might roll over, pretending to see nothing, by the man who had sexed or eaten dinner with the woman he married. An apple might have stopped its exhausted step at the shoes of him who'd found a profound and secluded star in the sky. Apples, inevitably, might hang around the man with repetition of appearance and disappearance. The man goes uphill and flashes upon the apples which would get lost between pale streets.
The man drops an apple from where his mother and the woman have been together. The fat and bouncy fruits are scratched in an instant following the road. For a little the apples seem to go to only one way, but immediately they scatter into a thousand ways. They are all urgent as running away from a contemptible life. There are apples, flurry, timid, running down the road. There are apples that vanish through small alleys. The alleys are too many to be bored, and the paths are curved profoundly. The man's goodness and ponderosity, meticulosity and lightness are shown on the road straightly. The man becomes angry for a moment. But he cannot resent the apples that aren't left around him for long. The man calls out the woman's name in a low, gloomy tone.

The woman is watching an unpopular movie by herself. She drinks her coffee, which is limited to only one cup a day because of the inflammation of her stomach. After all her family is sleeping, the woman listens to the story of the leaves that are wavering outside the porch window. She sees a dock-tailed cat on the flower bed, while she runs out in a hurry. She sorrowfully cries on a day when she has trimmed her nails and put on a beautiful makeup. Every day like this, she thinks about the apples that disappeared following the road. She imagines about the speed of the rolling apples, remembers the unknown road's vagueness, and is pestered by the coldness of the dead end. The woman tries not to forget where the apples are scattered upon in her whole life. That is why the woman does not eat apples.
The woman's friends looks at her funny because she wouldn't eat any apples. The woman's children were ashamed of her. Her husband often lost his temper with her because of eating no apples. The woman just eluded all these things easily. Because there's nothing more heavier than her regret in this world. Being perverse, hiding behind rationalization, or being unable to eat food out of despair, apples were what she could never forget.
Ten years have passed from the day that the man scattered the apples again to collect them. The woman didn't know, but it was enough time for the man. But the assumption that the woman doesn't know is only available if one does not consider the thing over her unconsciousness. The woman might have known where all the scattered apples meet together again finally.
Now the man and the woman are aged enough not to regard the routine surrounded with which shouldn't be in such way.

The woman decides to go to the house where the man and his mother had lived in. Since the nearly buildings have grown taller, the man's house which was seen then down the street doesn't appear yet. The woman determines to go through a small alley towards the man's house, instead of the main road. There is two neighboring stores selling fruits with apples. She passes a dressmaker's where a mannequin is standing with clothes and a hat as red as apples. When the woman turns the corner and sees the main road, she goes into another small alley across. She passes a few houses with the crabapple tree pots on their fence. The small hard particles are shining in right scale. When she reaches the skirt of the alley connected to the main road, she can see a playground which has a theme of apples. The road where the woman is walking is filled with strong apple's scent. The woman's heart is beating more than when she walked this road 26 years ago, as a 26 year old lady. Although she has passed only two small alleys now she can anticipate what's on the path that she will walk on. Even if you don't complain, cry, or exclaim in sorrow, there is a thing you can know. There is an age when you can do that. The woman can know that in this path all the apples that scattered into a thousand ways have met again. The woman laughs like the white apple flower.

Where the man, woman, and the man's mother have been standing is now occupied by a graceful apple tree. Red apples that have hidden their bluish color look at the woman boldly. The woman dyes her old and harsh skin reddish, because of these unshy eyes. Even though they took detour round back the road for a long time, the man and the woman would nod their heads because it wouldn't be too late. The woman bites on a small apple. The apple that finally returns to the woman through eternal recurrence, tastes like nostalgia.

The Road with Reasons

The Road with Reasons
Ahjin Shim
At last, Soo stopped his motorcycle near the Shell Tower in front of the police barricade. Never in his life had he felt more relieved to see the police. As he braked he thought, at least this way, I wont die alone defenselessly. Probably due to lack of time, all the police had managed to mobilize were police cars. No sprinkler trucks or vehicles with 'wall' for crowd control. The motorcycle squealed violently, like the scream of a dying person, and Soo was thrown to the left side. The emergency lights, the sirens, and the noise from the bull horns turned the whole area into a mad frenzy. The Thing, which had been chasing Soo, froze. It halted all rolled up like a giant pinwheel candy.

The police were very tense in the face of this phenomenon, which they couldnt even determine whether to be a man-made or a natural disaster. Two policemen approached, training guns at Soo, and handcuffed him. The crowd quickly gathered around and began taking pictures of Soo and the Thing with their smart phones. Even forgetting to protest against being handcuffed, Soo gazed at the Thing which had followed him for such a long distance. The peeled off pavement resembling a rolled up carpet, alongside the Cheonggye creek, towered behind the toppled motorcycle.

The news about Soo spread quickly throughout the nation via cell phones and the internet. The police departments of the South Gate, Jongno, and Hyehwa districts began a joint investigation. The starting point was around Kosanja Bridge. About 9 P.M. on Sunday, the pavement alongside the Cheonggye creek peeled off and rolled forward and followed Soo on his motorcycle. Soo came to realize what was happening as he was passing the Wang Shim Ri district.

At first, I didnt hear anything. The muffler of my motorcycle is terribly loud.

Soo saw a few people rollerblading on the sidewalks near the poorly lit closed market area. He slowed down because he knew sometimes skateboarders or rollerblade riders spill out onto the road. Thats when he sensed something and turned around to see this huge millstone-like thing right behind him. Soo thought it was going to roll right over him so he sped up. But the Thing kept pace and scared the devil out of him. It was around the East Gate when he realized that the Thing moved at the same speed as he was traveling. Soo didnt stop for fear that he might get flattened by the thing if he did.

The odd thing was I was the only one on the road.
Soo was still trembling as he remembered. When the police checked into it with CC TV, it was true. Granted it was Sunday night so traffic was light, during the 15 minutes or so when this incident took place, there was absolutely no west bound traffic on Cheonggye creek Road. There was, however, some east bound traffic and there were pedestrians here and there on the sidewalk. The police response was initiated by a call made by one of the witnesses from the sidewalk. The police made a few attempts to intercept Soos progress but failed until they eventually formed a blockade at the Sejong-daero Entrance area. Soo told the police that he, too, had tried to contact the police but had dropped his phone because he was too rattled. The police retrieved a broken cell phone near the rows of fish tanks in the closed market area. It was where Soo said he had dropped it.

Soo became even more anxious after losing his phone. While vacillating over whether to stop or not, he tore through the plastic barriers blocking cars for the Weekend Area. The Cheonggye creek near Gwangtong Bridge area turned into a chaotic mess. Many got hurt from bouncing rocks from the torn pavement. Fortunately, the rolled up pavement stayed on course, only following Soo.

Soo seemed a bit perturbed when he was asked why he didnt think of veering off to one bridge among lots of bridges over the Cheonggye creek.
If I had attempted to cross Nare Bridge or Soo Pyo Bridge, it would have collapsed due to the heavy weight of the Thing. I considered turning left too but there was oncoming traffic on opposite site. Anyway, the Thing was too close behind me.

What Soo said made sense. The Thing was a colossal concrete mass, almost 50 meters in diameter so one couldnt even begin to imagine how heavy it was.

The whole nation was abuzz over this unprecedented event. The police began looking into how many misdemeanor charges they could issue against Soo. However, none of the traffic monitoring cameras captured Soo ignoring the traffic lights or the speed limits. Even if he had violated those laws, considering the perilous circumstance he was in, they couldnt accuse him of a major offense. The loud muffler, which had prevented him from hearing the noise of the road tearing off, when they measured it, it didnt exceed 80 decibel points so they couldnt charge him for a noise violation either. Could he have been riding recklessly since he failed to notice what was going on around him? Soo replied, Who looks behind all the time while riding a motorcycle?

Cheonggye creek Road, claimed to be the pride of Seoul and the oasis for the citizens, exposed its inner part like the flesh of a slaughtered carcass. People couldnt believe that the ground could peel like the skin of a fruit. The buried underground steel rods and sewage tunnels had been exposed. The road from the Majang to Kwanghwa district was blocked off. Since the traffic had to be detoured, the major roads in the heart of Seoul suffered from severe congestion. Within a day, the merchants and the citizens in the affected area began complaining vociferously. The Ministry of Transportation and Construction, the Ministry of Land and Maritime Affairs, and other scientific institutes all launched researches on this so called land mass or rock mass, but beside the obvious fact that the land had rolled up, they couldnt come up with any new findings.

The first group which raised its voice was the religious people. Taking this occurrence as the sign for what they had been waiting for, the imminent Judgment Day, they looked expectant. They claimed that Heaven no longer would tolerate the present situation in which people pursue development single-mindedly while forsaking humanity. Environmental organizations also chimed in. They accused the present governments policy of constructing visually striking and impressive structures while ignoring their effects on ecology, causing this disaster to happen. They dressed in green and held a rally at the site of the incident. A group of young artists released a statement, inspired by the rolled up road, which reminded them of a snails shell. An organization which researched the history of Cheonggye creek demanded a special grant to study the hidden secrets of the region. A shaman organization asserted that the wrath of Queen Sinduks spirit, which had been hovering around Gwangtong Bridge, was the cause of this phenomenon and called for a nationwide sacrificial rite.

There was no shortage of people who wanted to have their say. Any individual or group which believed they had something to do with the event released their statements. Finally, the politicians entered the picture. The private indiscretions of the heads of the concerned ministries were exposed by the media and castigated. The ruling and the opposing parties claimed the other responsible for the incident. The overwhelming sentiment was that the established system should find someone to pay. But there were few who were weak and dopy enough to be a scapegoat.
Fingers began to point to Soo.

Although Soo was initially found not guilty and released, he was summoned back to the police station and the court for further interviews and investigation. Cheonggye creek and his name became the most searched words on the internet.

Age 28, residence in Majang District, an employee at a mannequin wholesale company in Shinpyeonghwa market, the place of birth, hobby, love interest

Many of Soos acquaintances made comments about him on the internet. When the information about his penchant for visiting bookstores despite being just a humble market worker became known, many malicious bloggers built conspiracy theories. The consensus was that there was something fishy about Soo. His rental home became an issue. The area was traditionally known for a beef market. According to one theory, there were spots where the slaughtered cows grudge was concentrated and three of those spots happened to overlap at Soos house. Someone attempted to draw a connection to a spooky folklore tale from his hometown, The Talking Forest. Some cited the significance of Soo once touching the statue of Jun Taeil, an anti-government protester who died by self-immolation, located on the Willow Bridge. Another even advanced the theory that Soo was a North Korea sympathizer. Soos employer, the mannequin store owner, had a hard time fielding questions from the throng of reporters. One avant-garde artist, saying she suddenly became inspired about naked existence, stood up at Cheonggye Square disguised as a mannequin.

Soos everyday life was put under the microscope. He had worked as a clerk for a series of stores in the East Gate Market. He once worked for a shoe wholesale store, and also worked for a tool shop. He didnt have professional expertise and worked in sales or delivery. Sometimes he stopped by a coffee shop there were hookers. Since he left his hometown at eighteen, he lived in rental homes in the Majang District and had worked for ten and some years but all he had was less than two million won in his Installment Savings Account for Home Buying. He once lent some money to some friends and never got it back. He was laid off by a tile store, where he had had the longest stint, without being paid for a few months worth of past due wages. His present life wasnt much better than the one ten years ago. Nothing extraordinary had been detected in the way he lived his life. Soos life was so ordinary that it seemed almost unreal. Yet the investigation on Soo continued.

In the mean time, the colossal mass remained at Cheonggye Square. Some insisted that it should be cleaned up immediately and others asserted that it should be left there as a monument to this historic event. So, the future of the Thing was up in the air. Traffic conditions were still horrible and many citizens in the area complained more. The leadership ability of the authority was questioned and accusations about who was ruining the country circled around cyber space. Everyone was getting angrier and more frustrated.

One fact that was viewed as odd was that Soo had decided to go, of all places, to Kyobo Bookstore at that exact time by the Cheonggye creek Road. Soos explanation was quite simple. They have many books there. But that reason was much too simple to be accepted. Among the Soo accusers, one especially fervent one pulled out words from the list of books Soo had purchased and displayed: desire, admiration, wind, standstill, contradiction, new, opportunity, eternity. Trials were held multiple times. Contrary to the first verdict which was not guilty, applying the Criminal Law articles 87 and 115, Soo was convicted of treason and sedition for committing an offense against the safety of the state. The public defender, who had assured Soo that he had a fighting chance, completely disappeared after the verdict.

Soo got incarcerated. He wondered if he was in jail because he had said the wrong thing. Instead of just saying, They have many books, he mighy have to add more like, I went out for some fresh air. Maybe, he thought, he visited the bookstore too often and that was the problem. But he didnt say anything about the female clerk there whom he was secretly in love with. He didnt want her picture uploaded on the internet.

Soo felt sad and gloomy. He couldnt say that he ever had a great life but he did all he could. He couldnt understand why this was happening to him. Why didnt the Thing follow other motorcycles like Harley Davidsons? Why did it happen around Cheonggye creek instead of Han River? He hadnt even enjoyed a leisurely date around the area.

He thought about that night. While being chased by the rolling pavement, he remembered looking up to see the crescent moon. Over the dark buildings which harbored tiring, loathsome daily struggles, there was the glint moon. While being under such a desperate circumstance why did he even look above? The sliver of the moon had felt unfamiliar and cold to him like the cold floor he was sitting on.

The moment Soo remembered the moon, which had resembled an eyebrow, strange things began to happen in various places in Seoul. The roads began to rip open and roll forward. From behind the motorcycle which was delivering fabric material, the ambulance which was taking a patient to the hospital, a sedan with the radio turned up way high, the pizza delivery motorcycle, the roads ripped open and rolled after them. Just like the way the outer layer of scallion peel when you slice them on end, the roads rolled up. The exact same duration as with Soos case on Cheonggye creek Road, many roads throughout the nation rolled up. Panic engulfed the entire nation. The people who had had so much to say and blame to assess when it happened to just one person, Soo, all became mum because they knew that the road they were walking on or driving on could suddenly roll up from behind.

It goes without saying, Soo declared not guilty and released.